항목 ID | GC40021435 |
---|---|
한자 | 夫仁洞 洞約, 大同社會- |
영어공식명칭 | Buindong Dongyak, We dream of a Big Socie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신무동|공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부인동 동약, 대동사회를 꿈꾸다 -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 |
부인동 동약, 대동사회를 꿈꾸다 -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 |
부인동 동약, 대동사회를 꿈꾸다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
[정의]
1739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신무동, 용수동 일대에서 백불암 최흥원이 실시한 동약.
[향약의 유래]
북송의 남전여씨(藍田呂氏)에 의해 창안된 향약은 남송대 주자의 수정·보완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향촌사회의 운영원리로 『소학』교육과 함께 각광받게 되었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유입된 주자향약은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사림 세력에 의해 실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는가 하면, 1517년(중종 12)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에 의해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이 출간되면서부터 조선사회에 급속히 확산 보급되었다. 그 후 주자학 연구의 심화와 함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조선적인 향약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두 학자를 모범으로 한 영남학파, 기호학파는 양대 향약의 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최흥원 가문의 부인동 정착]
경주최씨 일족이 대구광역시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11대 조인 최맹연(崔孟淵)부터이다. 최맹연은 만년에 중앙 관직에서 밀려나자 대구[대구광역시]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지묘동, 도동, 둔산동[옻골마을] 등지에 세거하게 되었다. 최흥원의 6대조 최계(崔誡)[1567~1622]는 임진왜란 때 초유사 학봉(學峰) 김성일(金誠一)로부터 대구의병가장(大邱義兵假將)에 임명되어 활동한 공으로 선무 2등공신이 되고, 곧이어 현령으로 출사하였다. 최계의 의병활동을 통해 경주최씨 가문이 향촌사회에 이미 확고한 사회적 또는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흥원의 5대조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이후 효종의 사부로 명을 받았으나 부임 도중에 면직되었다. 명나라가 망하자 팔공산 부인동[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용수동·신무동 일대]에 농연정(聾淵亭)을 지어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동민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특히, 최동집은 부인동민들과 더불어 계(稧)를 만들어 규약을 세우고 그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쳤다. 부인동은 팔공산 중턱 부인사 아래로 땅이 기름지고 심한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어서 논농사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최동집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는 등 확고한 재지기반을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무너지는 마을 공동체]
17~18세기 조선은 고난의 시대였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과 같은 전란과 대기근으로 인해 짧은 시간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양난 이후 5군영이 차례로 창설돼 필요한 군비는 오히려 늘었다. 이처럼 인력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양반들은 합법적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 더욱이 양반뿐만 아니라 부유한 양민까지도 양반을 사칭해 군역을 회피하곤 하였다. 이 때문에 지방 관아에서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군포를 이웃에게 부담시키는 인징(隣徵), 친척에게 전가하는 족징(族徵) 등을 자행하였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동요는 종전부터 이어져 오던 경주최씨 일족의 부인동 지역에 대한 지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최흥원의 『부인동지(夫仁洞誌)』에 “달성은 면화산지로 모든 세금과 부역이 면화에서 나오는데, 다만 부인동만은 논[수전(水田)]이 많아 면화 재배가 어렵다. 그래서 농민들은 추수의 태반을 세금과 부역의 비용으로 충당하니, 비록 풍년이라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근래 상한(常漢)들이 분수에 맞는 부역을 꾀를 내어 피하고, 분수에 넘치는 임무를 희망하여, 이유 없이 이사를 가거나 틈을 봐서 달아나는 경우가 있으니, 매우 답답하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렇듯 부인동 일대 농민들의 유리(流離)는 경주최씨 일족의 재지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였다.
[부인동 동약의 실시]
「부인동동약」은 백불암 최흥원이 1739년(영조 15)에 대구광역시 동구 부인동에서 실시했던 향약으로, 그의 일족이 중심이 되어 조직·운영되었다. 백불암 최흥원은 당시 영남 사림으로는 드물게 실학정신에 투철했던 인물이다. 44세 때 실학의 거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읽고 “근세의 경륜학으로는 『반계수록』이 최고다.”라고 크게 감복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경상감영에서 『반계수록』을 간행할 때 손수 교정을 맡아볼 만큼 실학에 열심이었다.
최흥원이 부인동에 동약을 실시한 것은 5대조 대암 최동집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계를 만들어 실시한 곳인 데다 이곳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인해 부인동 일대 농민들의 유리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것은 경주최씨 일족의 재지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따라 최흥원은 우선 농민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恤貧庫)를 설치하여 조정의 수탈을 완화하여 농민의 유리를 막음으로써 동리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 위에 향촌의 지배질서 체제 유지를 위한 교화의 방법으로 강사(講舍)를 설치하여 동약을 실시하였다.
「부인동동약」은 중산리(中山里), 근전리(芹田里), 무산리(舞山里), 부남리(夫南里), 즉 4개의 자연촌락을 포함하고 있다. 부인동은 이 4개의 자연촌락을 포함하며, 동약이 실시되었던 마을로 일종의 별칭인 듯하다. 「부인동동약」은 동약소(洞約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동약은 동약존(洞約尊), 약직(約直), 이정(里正), 전곡(典穀)이 주관하였고, 관령(官令)에 관련된 일은 이임(里任)과 공사원(公事員)을 정해 거행되었다.
이중 동약존의 신분은 양반으로 약정(約正) 이하를 차출하였고, 선공고의 계장(稧長)을 겸임하고 있었다. 동약존은 맨 처음 최흥원이 역임하였고, 이후 그 후손에게 세습되었다. 약직의 신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상인(上人)이나 중서인(中庶人) 가운데 차임 된 듯하다. 이정과 전곡은 하층민에서 차임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곡물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동약의 구성원인 약원(約員)은 부인동의 모든 동민을 대상으로 했으나, 설립 당시에는 이주민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동약의 구성원인 부인동의 동민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강당에 모여 동약을 강론하였다.
「부인동동약」 조직의 독특한 내용으로는 선공고 및 휼빈고와 공전(公田) 설치에 있다. 선공고란 공전을 마련하여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동약에 참여하는 동민들의 전세(田稅)를 대납하는 것이다. 공전은 동약 실시 이전부터 유래해 오던 것으로 동답(洞畓)을 팔아서 이를 굴려 얻어진 이익으로 마련된 토지를 말한다. 그러나 전세의 대납만으로는 농민들을 마을에 붙잡아 둘 수 없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전세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휼빈고란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경작할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그들을 촌락사회에 안착시키고자 한 것인데, 진휼(賑恤)과 상례 및 장례의 부의(賻儀)로도 이용되었다. 부인동에서 시행되었던 향약 자체의 내용은 다른 곳의 향약과 마찬가지로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사대강목(四大綱目)을 토대로 선현의 조약과 마을의 옛 규약을 참고하여 당대에 맞게 고친 것이다.
[흔들리는 부인동 동약]
「부인동동약」은 정조에게도 알려졌을 뿐 아니라 당시 지식인에게도 알려져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지방관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부인동동약」은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계속적 실시가 어려워졌고, 「부인동동약」 조직 내부의 문제로 인한 계층 간의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1802년(순조 2) 최씨의 얼족인 최흥준(崔興濬)이 홍수로 무너진 공전비(公田碑) 중수를 반대하면서부터다. 당시 최흥원의 손자 최식(崔湜)이 계장(稧長)이 되어 「부인동동약」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공전비 중수를 위해 별도 재물을 취식(取息)하고 있었다. 이때 최흥준은 많은 양을 대부(貸付) 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최식은 「동약법」에 따라 태노(笞奴)[매질]의 벌을 시행하자, 최흥준은 공전 일부를 임의로 취하고, 계를 분리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에는 당시 최흥준이 서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 「부인동동약」이 성립된 초창기부터 지나치게 사족 위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세력들, 즉 서얼 및 하층민에 의한 저항이 요인이 된 듯하다.
당시 최흥준과 이해를 같이하던 세력 중에는 부인동의 양반이었던 이진형(李眞亨)처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민 및 면임(面任)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최흥원 본가의 호적을 다른 면으로 옮길 것과 부인동 분할을 주장하였다. 즉 「부인동동약」의 파기를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최흥준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1804년(순조 4) 경주, 칠곡, 안동 등지의 유림 700여 명이 감영에 소장을 올려, 최흥준에 대한 엄한 처벌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 끝에 관에서는 최흥원 본가의 호적을 다른 면으로 옮길 것과 부인동 분할을 명하여 「부인동동약」이 파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파기된 「부인동동약」은 이후 더 이상 복구되지 않는다.
1806년(순조 6)에는 다시 700여 명 도내 유림이 경상감영에 재차 소를 올려 이번에는 최흥준이 적손을 능멸한 서얼이라 하여 정배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한 갈등은 지속되어 1830년(순조 30)에 최흥준·최봉성(崔鳳成) 부자에 의해 다시 부인동 분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1854년(철종 5)에는 부인동 동민인 이창진(李昌振)과 정윤기(鄭允基)가 최봉성과 함께 부인동 분할을 주장하였다. 부인동 분할 문제는 결국 그들의 후손대에도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부인동동약」의 파기는 최흥준 개인의 주장은 아니었다. 선공고, 휼빈고의 운영에서 나타난 문제가 결국 부인동 분할이라는 공통된 주장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인동 동약의 의의]
18세기 안동의 큰 학자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은 「부인동강당기(夫仁洞講堂記)」에서 “부인동에 사는 사람들은 굶주림을 근심하지 않고 조세를 독촉받지 않으며, 오직 농사와 가정에 충실하고 한가할 때면 덕업상권(德業相勸)과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도를 배운다. 이것이 정전(井田)은 아니지만 정전법의 취지를 살린 것이니 말세에 요·순·우 삼대의 아름다운 풍속이 남아있다.”고 하며, 「부인동동약」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부인동동약」의 운영과 관련된 자료가 망라된 『부인동지(夫仁洞誌)』에서도 “「부인동동약」이 시행될 당시 고을 수령과 관찰사 등 여러 사람들 중에 칭찬하며 찬조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는데, 조재연(趙載淵)·윤계동(尹啓東)·최경흥(崔景興)·이성중(李成中)·조운규(趙雲逵) 같은 이들이다. 이중에 어떤 사람은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어떤 사람은 조세가 면제되도록 해주었으며, 심지어 영의정 이공(李公)이 안절사로 있을 때 특별히 자신의 봉급 50포(苞) 정도를 마을에 기부하기까지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부인동동약」은 시행 당시에 이미 동약의 좋은 사례로 지목되며 지방관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부세의 감면 조치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사창법」 시행에 대해 정조와 이병모(李秉模)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좋은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조에 시행된 대부분의 동약이 그 조목만 전해질뿐 실제 시행 기록이 자세하지 않은 데 반해, 「부인동동약」은 선공고와 휼빈고라는 구체적인 제도와 결부되어 실제로 시행된 기록들이 풍부하다. 또한 백불암 최흥원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이어가며 100년이 넘도록 시행되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2013년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연합(UN)이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개발도상국에 적용되고 있는 한국식 발전 모델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어느 날 불쑥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발달한 지방자치의 싹인 ‘향약(鄕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부인동동약」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향약인 만큼 그 의의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