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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부인사에서 타오른 의병의 횃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436
한자 八公山 符仁寺- 義兵-
영어공식명칭 Torch of loyal troops in the Buinsa Temple of Palgongsan Mounta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7월 6일 - 팔공산 부인사에서 타오른 의병의 횃불 제1차 공산의진 결성
팔공산 - 대구광역시 동구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서 결성되어 조선을 지킨 의병들.

[왜적의 야욕, 조선을 삼키다]

1598년(선조 31)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으면서 1592년(선조 25)부터 시작된 7년 동안 한반도를 고통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매우 참혹하였다.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었고 국토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토지 대장이나 호적이 불타면서 세금을 부과할 근거가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서책·도자기·불상·활자 등 각종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약탈당했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한 이후, 지방 영주와 신흥 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대륙 침략을 도모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대륙 침략을 결정하고,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치는데 앞잡이가 되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풍부한 실전 경험에다 신무기인 조총까지 보유한 왜적은 가공할 위력으로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조선 조정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하여 명에게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전란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놓인 대구]

1592년 4월 13일, 부산[지금 부산광역시]에 상륙한 왜적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선발대는 동래성을 함락한 뒤 기장·양산·밀양·대구 방향으로 진격해 4월 21일 대구성(大邱城)[지금 대구광역시]을 점령한 뒤에 인동·선산을 돌파하고 상주를 공격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2번대는 언양·경주를 거쳐 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문경에서 선발대와 합류하여 충주로 진격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3번대는 김해·창녕을 거쳐 영동·회덕·청주를 따라 한양으로 돌진하였다. 대구는 왜적의 북상로 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대규모 왜적이 속속 대구를 거쳐 북상하였다.

대구성은 평지인데다가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구부사 윤현(尹晛)은 왜적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적의 예봉을 피하는 데 급급하였다. 그는 관내의 군민 2천여 명을 이끌고 공산성(公山城)으로 물러나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이 때문에 대구성은 왜적에게 점령되었고, 후속부대의 경유지 또는 후방 경비부대의 주둔지 역할을 하였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제7군은 주로 대구의 수비를 담당했는데, 그는 이곳에 관사를 건축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정(親征)에 대비하였다. 모리 데루모토가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후속 부대가 대구를 점령했는데, 8~9월경에는 1,400여 명 왜적이 가세하기도 하였다.

왜적의 진격 및 주요 주둔처였던 대구에서는 왜적의 공격과 약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즉 군사를 조직하여 맞대응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왜적의 약탈에 대한 섣부른 반격이 오히려 가혹한 보복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촌락 단위의 개별적 항쟁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여 도리어 왜적의 가혹한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팔공산에서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하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밀양과 청도를 거쳐 팔조령을 넘어 1592년 4월 21일 마침내 대구로 진입하자, 대다수 대구 사람들은 팔공산으로 피신하였다. 대구에 진입한 왜적은 민가를 비롯한 시설물을 불태웠으며 신속하게 대구성과 대구향교 등을 점령하였다. 1592년 4월 23일에는 무태의 도덕봉을 넘어 팔공산 파계사까지 진입하기도 하였다. 1592년 4월 24일 군사를 이끌고 병영으로 향했던 대구 부사 윤현이 돌아왔는데, 읍성이 이미 왜적에게 점령당한 것을 알고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를 임시 거점으로 정하였다. 대구부사를 비롯한 향리들은 팔공산을 거점으로 삼아 건재함을 보이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했던 것이다.

이즈음 사족들이 동지를 규합하고 자제와 노복을 이끌고 관군과 협동하여 왜적에 맞서기를 격려하는 선조의 「죄기교서(罪己敎書)」[국난이 있을 때 임금이 자신의 죄를 자책하면서 내리는 교서]가 도착하고, 다른 지역 의병들의 활약상과 대구에서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통문과 격문이 답지하면서 대구 사족들도 의병 결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592년 5월 28일 팔공산으로 피난을 온 대구지역 인사들이 팔공산 부인사에서 회합하여 창의(倡義)를 발의하였다. 1592년 6월 8일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동화사에 머무르면서 향병 모집을 독려하는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 초안을 다듬었다. 1592년 6월 27일에 대구부사의 처소인 동화사에 모여 향병을 불러 모으는 일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 7월 6일에 이르러 팔공산 부인사서사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 지역의 인사들이 향회를 열어 그동안 다듬었던 격문과 「향병입약(鄕兵立約)」을 확정짓고, 의병장을 위시한 참모들의 인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1592년 7월 13일 부인사 뒤의 고개에서 서사원이주 등의 사람들이 모여 구체적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1592년 7월 18일 동화사에 모인 10여 명 면리장과 유사들은 질병으로 의병장을 고사한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을 대신해서 서사원을 향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향병 구성이 막바지에 접어든 1592년 7월 24일에 대구부의 가장(假將)으로 최계(崔誡)를 임명하고, 소모관으로 서사원을 임명한다는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첩지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공산의진이 진용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초유사의 의견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1592년 7월 24일 드디어 대구 의병의 격문을 경산으로 발송하는 등 다른 지역에도 대구 의병의 창의 소식을 널리 전하였다. 7월 30일 동화사에서 향병도목을 완성하고 「향병입약」을 재수정하였다. 이로써 대구부 전체의 면리별 의병 간부진의 인선 작업이 완료되었다. 실로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여러 곡절을 거친 값진 결과였다.

이때 만들어진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진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산의진 의병대장은 서사원이 맡았고, 참모진으로는 이주, 이경원(李慶元), 채선행(蔡先行)이 참여하였다. 읍내는 7개 동리별로 이장과 유사를 배치하였다. 3개 속현에는 각각의 현을 책임질 현대장으로 손처눌,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선임되었다. 손처눌이종문은 한 개의 면단위 장을 맡으면서 현을 책임진 상태이고, 곽재겸해안현의 5면도대장이란 직함으로 현을 총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렇게 면리별로 이장과 유사를 편성하는 체제는 지금까지 알려진 의병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체제인데, 이는 안집사 김륵(金玏)의 조처에 입각하여 의병진을 짠 것이다.

[공산의진군, 왜적에 맞서 싸우다]

대구지역의 의병 활동은 팔공산에서 공산의진군 결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전부터 곳곳에서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른 시기에 의병을 일으킨 최인(崔認)최동보(崔東輔)는 1592년 4월 22일 반야월에 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며, 1592년 4월 23일에는 삼구(三衢)에서 왜적과 싸워 수십 급(級)을 베었고, 1592년 4월 26일에는 화담에서 전투를 벌여 조총과 긴 창 50여 자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정여강(鄭汝康)은 1592년 5월 6일에 종숙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과 함께 마을의 장정과 노복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결성한 뒤에 왜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592년 5월 7일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빈에서 상륙하는 왜적을 기습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 등 거듭 승전보를 울렸다. 이 일로 정여강은 관군의 우위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서재겸(徐再謙)·전계신(全繼信)·이윤의(李潤義) 등도 의병을 일으켜 전과를 올렸다.

대구 곳곳에서 소규모로 일어나고 있던 창의 활동을 수합하여 대구부 전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 공산의진군의 결성이었다. 공산의진군은 1592년 8월 2일 팔공산 아래 배연리(背淵里)에서 의병 결성과 더불어 군대를 점검하고 진법 훈련을 하였다. 이날 금호강을 건너 팔공산 경내로 진입하던 왜적을 추격하여 물리쳤고, 금호강 밖으로 쫓아내는 전투가 한 차례 있었다. 이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의병은 해안현과 수성현 의병이다. 최계유요신 등이 주축을 이뤘던 해안현 의병은 1592년 8월 10일 용진에서 왜적 30명을 죽였고, 1592년 8월 19일 밤에는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금호강에 부교를 만들던 왜적을 급습하여 수십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1592년 9월 28일에는 달성으로 진지를 옮겼다가, 1592년 10월 3일 왜적이 철수했다는 소문을 듣고 팔공산으로 회군하였다. 손처눌이 주축이었던 수성현 의병은 매복을 주로 하였다. 수성현의 남쪽에는 팔조령은 왜적이 부산에서 청도를 거쳐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팔조령의 방어는 매우 중요하였다. 손처눌은 팔조령의 형세를 이용하여 모집한 정예병 400명을 매복시켜 적의 길목을 끊어 왜적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저지하였다.

한편, 1592년 8월 29일 의병대장 서사원은 왼팔이 마비되는 질병에 걸린 데다가 할머니마저 사망하는 바람에 의병대장의 임무를 손처눌에게 넘겼다. 이때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팔공산을 방문했는데, 손처눌은 김성일과 함께 관군과 의병이 합심하여 왜적을 효과적으로 토벌할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손처눌은 왜적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복병을 배치하는 매복전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생각하여 중요한 요충지에 매복하는 데 주력하였다. 팔조령 진지가 함락되자, 아우인 손처약(孫處約)에게 궁노수 70여 명을 이끌고 팔조현의 정현(鼎峴)에 다시 진지를 구축하여 몰려오는 왜적을 막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1592년 12월에는 다음해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각 진영에 병기를 제조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2월에 손처눌 역시 부친상을 당하여 의병장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대구 의병의 활동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는 의병이 점차 관군으로 흡수되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잘 드러난 공산의진군]

공산의진군의 향병장과 유사는 모두 49명인데, 모두 대구지역의 재지사족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름만 전할 뿐 행적이 전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공산의진군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비교적 행적이 알려진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공산의진군 결성을 주도했던 인물로 낙재 서사원을 꼽을 수 있다. 서사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이다. 1550년(명종 5)에 성주 팔거현(八莒縣)에서 태어나서, 1615년(광해군 7)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공산의진군 의병대장을 역임하였고,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문경새재 축성에도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하빈현(河濱縣) 이천(伊川) 가에 은거하여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매진하여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손처눌은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1553년(명종 8)에 대구부 수성리에서 태어나서, 1634년(인조 12)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공산의진군 결성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서사원의 뒤를 이어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의병을 이끌고 달성·동화사·팔조령 등지에서 매복 기습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정돈하여 팔조령에 매복하여 왜적을 물리쳤고, 다시 달성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지역의 유생을 모아 선사재(仙査齋)와 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강학하여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곽재겸은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본관은 포산(苞山), 자는 익보(益甫), 호는 괴헌(槐軒)이다. 1547년(명종 2)에 달성군 솔례리(率禮里)에서 태어나서, 1615년(광해군 7)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해안현의 5면도대장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에 나아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다. 그해 가을 공산성이 함락되자, 권응수(權應銖)와 함께 달성 아래까지 왜적을 추격하였다.

이주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경임(景任), 호는 태암(苔巖)이다. 1556년(명종 11)에 대구 파잠리(巴岑里)에서 태어나서, 1604년(선조 37)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공산의진군 결성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손처눌에 이어서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군량미 조달과 의병 모집에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끝난 뒤에 환성정(喚惺亭)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여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이 밖에 하빈현(河濱縣) 대장을 맡은 이종문(李宗文), 하빈현 남면장(南面將)을 맡은 정광천(鄭光天), 초대 의병장에 추대된 정사철(鄭師哲), 수성현 북면장(北面將)을 맡은 채몽연(蔡夢硯) 등이 있다.

대구 지역 사족들의 의병 창의는 경상우도에 비해 다소 늦었고, 군량의 원활한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병장이 자주 교체됨으로써 의병활동을 전체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구심점이 결여되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대구 의병진은 의병 구성에 있어 면리를 기본 단위로 하여 장과 유사를 배치하여 대구부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대구 곳곳에서 소규모로 일어나고 있던 창의 활동을 수합하여 대구부 전체 차원으로 끌어올린 효과가 있었다. 이는 경상우도 지역의 경우와 상당히 다른 대구 지역 또는 경상좌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대구 의병은 전공이 그렇게 혁혁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왜적의 후방을 교란시켜 그들의 진공을 늦추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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