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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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집필자 | 이민아 |
성씨 시조 | 이한(李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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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이한을 시조로 하고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세거하는 성씨.
[개설]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이후 수많은 분파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도봉 서원 마을에 전주이씨 영산 부정공파(榮山副正公派)의 세거지가 있으며, 도봉구 도봉동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波) 묘역, 방학동에 회산군(檜山君) 묘역과 임영 대군파(臨瀛大君波) 오산군(烏山君) 묘가 있다.
[연원]
전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세손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안사는 본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이후 간도 지방으로 가서 원나라의 다루가치[지방관]가 되었다. 이안사의 아들 익조 이행리(李行里)와 그 아들 도조 이춘(李椿)도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이춘의 아들 환조 이자춘(李子春)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를 지냈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정책에 응하여 쌍성총관부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는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원나라 군대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고려 말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대부분 왕비의 아들인 대군(大君)과 후궁의 아들인 군(君)을 파조로 하고 있다. 시기에 따라 세 갈래로 분파가 나누어진다. 즉,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이안사 이후부터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파, 이성계의 후손으로 왕자 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입향 경위]
전주이씨 중 도봉구에 묘소를 쓴 영해군파의 파조 영해군 이당(李瑭)은 세종의 9남이며, 회산군 이염(李恬)은 성종의 5남이고, 임영 대군파 오산군 이주(李澍)는 세종의 4남인 임영 대군의 아들이다.
도봉구는 도성과 멀지 않아 종친들의 묘역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이들이 도봉구에 세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도봉 서원 부근의 안골에 전주이씨들이 세거해 왔는데, 언제 입향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영산 부정공파 5세 이석과(李碩果) 이후 17세 이근의(李根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현황]
현재 도봉 서원 부근 안골에 거주하는 일가는 영산 부정공파 22세에서 23세까지 내려왔으며, 17세 이하의 당내친(堂內親)들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유적]
도봉구에는 많은 전주이씨의 묘역이 있다. 우선 영해군파 묘역은 도봉구 도봉동, 현재 전철 1호선 도봉역 맞은편 무수골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따라 성신 여자 대학교 생활관 방향으로 약 1.5㎞ 정도 가다보면 보호수가 있는데, 이 보호수의 북쪽 능선부에 자리 잡고 있다. 영춘군(迎春君) 이인(李仁)의 묘를 중심으로 한 서편과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 동편 묘역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회산군 묘역은 도봉구 방학 3동 극동 아파트 101동 좌측 등산로를 따라 능선 좌측으로 내려가 신동아 아파트 21동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임영 대군파 오산군 묘역은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향으로 진행하다 신동아 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왼편 구릉에 있다. 묘역의 입구에 재실이 있다. 각각의 묘역에는 묘와 관련한 신도비·묘표·문인석·동자석 등이 다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