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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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壤趙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집필자 | 이현욱 |
묘소|세장지 | 풍양조씨 묘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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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조맹(趙孟) |
[정의]
조맹을 시조로 하고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세장지가 있는 성씨.
[개설]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맹(趙孟)이 시조이고 경기도 양주를 관향으로 하는데, 풍양은 양주의 옛 이름이다. 4개의 파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회양공파(淮陽公派)에서 많은 고관(高官)이 나왔다.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함께 조선 후기 세도 정치기에 정권을 담당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숙종 대에 대사헌·이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을 지낸 조상우(趙相愚), 영조 대에 좌의정을 지낸 조문명과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 형제, 국구(國舅)이자 헌종 대에 영돈녕부사를 지낸 조만영(趙萬永),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趙寅永) 형제 등이 유명한데, 이러한 인물들의 누대에 걸친 현달을 통해 세도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입향 경위]
풍양조씨의 묘역이 있는 도봉구 방학동 일대는 조선 전기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으로 책록되고 풍양군(豊壤君)으로 책봉된 조세훈(趙世勛)[풍양조씨 11세손, 선대 6세는 실전]의 사패지(賜牌地)였다. 이 토지의 사패 이후로 조세훈을 비롯하여 그 후대의 풍양조씨들을 세장(世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조세훈의 묘를 현재의 위치에 쓴 이후로 그 후손의 일부가 인근에 거주했었다고 하지만, 대체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며 도성에 거주하였거나 현대의 도시화 등으로 인하여 현재는 집성촌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세훈의 고향인 충청남도 부여와 그 인근 지역에 풍양조씨의 집성촌이 있다.
[현황]
인구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2000년 현재 도봉구에 거주하는 풍양조씨는 345가구 1,128명이다. 그러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도봉구 방학동에는 풍양조씨의 세장지(世葬地)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인근에는 사당인 풍양군 사당이 있다. 조세훈이 풍양군으로 봉해지면서 후손들은 풍양군파로 분기하였고, 그를 파조(派祖)로 하고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며 풍양군 사당에서 향사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신정 왕후 조 대비(趙大妃)의 별서(別墅)가 도봉구에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관련 유적]
도봉구 방학동에 풍양조씨의 묘역 두 곳이 있다. 첫 번째 묘역은 신방학 초등학교 동쪽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중종 대 분의 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조세훈, 그 양자인 사헌부 감찰 조기(趙磯), 조기의 장남 조희철(趙希轍)의 묘가 있다. 두 번째 묘역은 신방학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첫 번째 묘역과 마주보고 있다. 이곳에는 조기의 3남 분승정원 승지(分承政院承旨) 조희보(趙希輔), 풍흥 부원군(豊興府院君) 조인수(趙仁壽)의 묘가 있다. 우의정을 지낸 조상우(趙相愚)는 조희보의 손자이고, 조인수는 조상우의 조카이다. 정승 조문명(趙文命)·조현명(顯命)은 조인수의 아들들이다.
가장 선대인 조세훈의 묘는 묘표, 상석, 문인석,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다. 묘표는 하엽형 1면비로 전면에는 ‘조선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 풍양군 분의 정국공신 통훈대부 풍저창수 풍양 조공 세훈지묘 증 정부인 평해 손씨 부(朝鮮贈資憲大夫工曹判書豊壤君奮義靖國功臣通訓大夫豊儲倉守豊壤趙公世勛之墓 贈貞夫人平海孫氏祔)’라 새겼다. 조세훈의 양자 조기의 묘는 근래에 호석(護石)을 두르고 묘표를 새로 세우는 등 정비를 하였다. 조희철의 묘 역시 근래에 호석을 두르고 묘표와 묘갈을 세우는 등 정비하였다.
조희보의 묘는 쌍분으로 묘표 2기,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을 갖추고 있으며, 최근에 정비하였다. 묘표 1기에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통정대부 분승정원 승지 조공 희보지묘 증 정부인 교하 노씨 부좌(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政大夫分承政院承旨趙公希輔之墓 贈貞夫人交河盧氏祔左)’라 새겼고 나머지 1기에는 ‘정부인 강릉 최씨지묘(貞夫人江陵崔氏之墓)’라 새겼다. 이를 통해 조희보와 교하 노씨를 합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인수의 묘 역시 정비를 거쳤고 각종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묘갈은 대제학 최규서(崔奎瑞)가 짓고, 판중추부사 서종태(徐宗泰)가 쓰고, 아들인 예문관 검열 조문명이 전자(篆字)를 새기었다. 전액은 ‘백분당 풍성 조공 묘갈명(白賁堂豊城趙公墓碣銘)’이고 비제는 ‘유명 조선국 중훈대부 행의금부도사 백분당 조공 묘갈명 병서(有明朝鮮國中訓大夫行義禁府都事白賁堂趙公墓碣銘幷序)’이다. 묘역에는 그 외에도 조세훈의 후손들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근래에 새롭게 지은 풍양군 사당이 있다.
한편,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 후기 익종(翼宗) 비 신정 왕후 조 대비의 별서가 도봉구에 있었는데 그 터에 현재는 광륜사가 세워져 있다. 조 대비는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지낸 조만영의 딸로서, 조선 후기 풍양조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