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0050
이칭/별칭 신사도선장(新沙渡船場)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소현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근세 이후 - 새말나루 개설
폐지 시기/일시 현대 - 한남대교 건설로 나루가 없어짐
비정 지역 새말나루터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지도보기
성격 나루터
관련 문헌 『강남구지』|『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구 향토지』

[정의]

조선 시대 이후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소재의 한강변에 만들어졌던 나루터.

[개설]

현재 강남구 신사동한남대교를 통해서 한강 맞은편 한남동과 연결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조운로(漕運路)가 통과하는 지역이었으며 근세에는 새말나루, 일명 신사도선장(新沙渡船場)이 있었다. 당시 새말나루는 강북의 한강나루[漢江鎭]와 연결되었던 교통의 요지였다.

[명칭 유래]

사평 근처 한강 쪽에는 ‘한강새말’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이 마을 동쪽에 또 다른 ‘새말’이 있었다. ‘서낭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도 이 근처에 있었다. 한남대교 남단에 있었던 새말나루는 새말이라는 마을 앞 나루의 명칭이다. 이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서 근처에 ‘새말나루’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행정 편의라는 명분에 의해서 우리 땅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새말[신촌(新村)]’과 ‘모래펄[사평리(沙平里)]’라는 마을 이름에서 각각의 앞 글자를 따서 신사동이라는 동명이 붙여졌다. 즉, 조선 시대 마을인 새말과 사평이 현재의 신사동으로 바뀐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새말 북쪽 한강변에 있던 새말나루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사평도와는 달리 근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5년 한강의 을축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번창해가던 사평의 교역 시장이 텅 빈 모래벌로 변하였고, 이곳 주민들은 다시 새말 부락을 만들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의 피난민이 남하하여 정착하면서부터 새말 부락은 반농·반상업 마을로 변모했다. 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던 때여서 주로 강남 일대에서 나룻배를 통해 서울로 채소를 공급하였다. 서울 사람들이 남쪽 지방으로 갈 때 새말나루를 많이 이용하였다.

1969년 한강에 네 번째로 한남대교가 놓이면서 새말나루가 사라지는 동시에 한강 남쪽의 땅값을 치솟게 하였다. 더불어 서울 강남 지역의 대규모 개발 시대를 열고, 1970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우리나라 전 지역의 일일생활권 시대를 만들었다. 건설 당시 제3한강교라 불렸지만,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한강 다리의 이름을 정리하면서 한남대교라고 바뀌었다. 2009년 7월, 한남대교 상에 한남 새말카페라는 이름으로 새말나루의 장소성을 살리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새말나루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한남대교 남단 강남구 신사동 한강변에 있다.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새말로 불리던 이곳은 한남동 한강나루터와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던 곳이며, 말죽거리 판교를 지나 남부 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관련 기록]

새말나루터와 관련된 내용은 향토지 성격을 갖는 『강남구지』·『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구 향토지』 등과 표지석에 수록되었다. 당시 한강 나루의 모습은 한말에 촬영된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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