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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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872年地方地圖廣州地圖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소현수 |
작성 시기/일시 | 1872년 - 『1872년 지방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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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 |
성격 | 고지도 |
관련 인물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고종 |
용도 | 전국의 지방 실정 파악을 통한 국방 강화 목적으로 작성된 지도 |
발급자 | 제작자 미상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가 표현된 조선 후기 경기도 광주(廣州) 지역의 채색지도.
[개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국방 강화를 목적으로 하여 1872년(고종 9) 3월부터 6월에 걸쳐 전국 지방의 지도를 제작해 올리게 했는데, 이것이 필사본 회화식으로 제작된 총 459장의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이다. 전국 차원의 군현 지도 중 하나인 『1872년 지방지도』에는 주요 산과 하천의 연결 관계를 주기(註記)하여 이어지는 맥과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광주전도(廣州全圖)」에는 강남구에 해당하는 광주부 언주면(彦州面)과 대왕면(大旺面) 일대에서 한강과 물줄기, 대모산, 육로가 표현되었다.
[제작 발급 경위]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조선사회는 18세기 영조·정조 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각종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실학을 비롯한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예술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조·정조 대는 지도 제작에서도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사회는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민생의 안정이 위협받게 되었다. 관료 사회의 부패는 정상적인 국가 정책을 집행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특히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사건 이후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고, 지방 실정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에 대한 실천으로써 흥선대원군은 1871년에 ‘열읍지도등상령(列邑地圖謄上令)’을 내려 전국적 읍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 차원의 지도 제작 사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지금의 강남 일대를 포함한 광주부(廣州府)와 함께 경기도 각 읍에서 지도를 만들어 올렸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조선 시대 관찬지도 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총 459매의 『1872년 지방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때 제작된 지도들은 군현 지도뿐만 아니라 영(營)·진보(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수합된 지방지도로는 가장 많은 양이다.
[형태]
『1872년 지방지도』는 전국의 1읍당 1장씩 그려진 회화식 채색지도로써 총 459매로 구성되었다.
[구성/내용]
『1872년 지방지도』는 1년에 못 미치는 짧은 시간에 제작·수합되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제작 원칙 하에서 체계적으로 그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 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도에 들어 있는 정보량이 풍부하다. 지도의 방위는 ‘동서남북’과 ‘건곤손간(乾坤巽艮)’의 글자를 혼합하여 표시하였는데, 북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지도 위쪽에 네 방위의 경계와 고을에 소속된 면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여 지역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1872년 지방지도』 「광주전도(廣州全圖)」에는 당시 읍치로써 군아(郡衙)가 있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훨씬 크고 상세하게 그려졌다. 각종 관청 건물과 성곽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되고, 고을의 경계선을 그렸는데, 경계선이 하천과 겹치는 부분에는 별도의 선을 그리지 않았다. 고을에 소속된 면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은 선의 굵기로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다.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언주면(彦州面)에는 한강과 함께 압구정, 무동도(舞童島)가 표기되었고, 봉은사(奉恩寺)와 선릉(宣陵), 정릉(靖陵), 양재역(良才驛)이 산악 표현과 함께 적혀있다. 아래쪽으로 대왕면(大旺面)에는 대모산과 함께 헌릉(獻陵), 인릉(仁陵), 봉헌사(奉獻寺)가 표기되었다.
[의의와 평가]
『1872년 지방지도』에는 역과 파발(擺撥), 주막촌까지 정확히 표시하고 있으며, 산줄기 표시는 생략되었으나 고개의 존재는 상세히 알려 주며, 주요 도로가 표현되어서 실용성을 중시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지도상에 파발 표시가 많은 것은 한양 광희문에서 경안, 이천을 거쳐 충주로 가는 길이 영남대로의 파발로였기 때문이다. 지도에 표기된 양재역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 광주전도는 강남구 일대가 표현된 고지도 중에서 선릉, 정릉, 헌릉, 인릉과 봉은사, 봉헌사 등 다양한 지명이 표기된 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