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93 |
---|---|
한자 | 惠定公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나각순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45년 - 혜정공 출생 |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21년 - 혜정공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53년 - 혜정공 신도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2월 5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 |
현 소재지 | 혜정공 신도비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 31길 20[수서동 산 10-1]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혜정공|광평대군|송시열 |
크기(높이) | 비신 68×245×68㎝|비좌 123×124×63㎝|기대석 183×184㎝|전체 높이 387㎝ |
소유자 | 광평대군파 종중 |
관리자 | 광평대군파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조선시대 영의정 혜정공(惠定公) 이유(李濡)의 신도비.
[개설]
혜정공 이유[1645~1721]의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다. 이후재(李厚載)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군수 중휘(重輝)이며, 할아버지는 형(逈)이고, 어머니는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이단하(李端夏)·민정중(閔鼎重)의 아낌을 받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민진후(閔鎭厚) 등과 친하였다.
이유는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헌납·정언·지평·교리·수찬·응교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경상도 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94년 갑술환국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 판서가 되었다. 1702년 양역(良役) 사무에 밝아 특별히 병조 판서로 임명되면서 이듬해 설치된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 구관당상을 겸임, 양역변통문제를 담당하였다. 그 뒤 1704년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통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 군포균역급해서수군변통절목(軍布均役及海西水軍變通節目), 교생낙강자징포절목(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마련해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양역 사무를 크게 정비하였다. 그 공으로 1704년 우의정에 오르고, 뒤이어 좌의정·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삼정승으로 있으면서 특히 도성 방어의 강화를 힘써 주장, 경리청(經理廳)이라는 재정 마련의 특별기구까지 설치해 가면서 일부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의 수축을 완료하였다. 1718년 영중추부사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경세가로서 양역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호포론(戶布論)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군문·군액의 조정과 감축, 군포 부담의 균일화와 같은 점진적인 개선책과 교생·원생(院生) 등의 명목으로 피역하는 자[閑游者]에게 군포를 거두는 유포론(游布論)[校生贖布論]을 주장하였다.
[건립 경위]
혜정공 이유가 1721년 7월 27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예에 따라 조회를 파하고 3년간 녹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광주 광수산 선영의 해좌(亥坐)의 언덕에 예장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묘지(墓誌)를 썼으며, 1727년(영조 3) 민진후와 함께 경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혜정(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753년(영조 29)에 손자 이시중(李時中)이 권상하에게 비명(碑銘) 짓기를 부탁하여 신도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위치]
수서동 광평대군파 묘역 남동단에 접해 있는 전통가옥 필경재(必敬齋) 안에 있다.
[형태]
옥개형 4면비이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에 합각을 얹은 형태로 처마 끝의 반전이 심하며, 비신은 사각기둥형이고, 비좌는 정방형 대좌로 되어있다.
[금석문]
신도비 비신 상단에 4면을 돌아가면서 전서(篆書)로 ‘영의정시혜정이공신도비명(領議政諡惠定李公神道碑銘)’라고 새겨져 있다.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시혜정이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惠定李公神道碑銘幷序)’이다. 비문은 좌참찬 이재(李縡)가 짓고, 손자인 예문관검역 이최중(李最中)이 글씨를 썼으며, 원임우의정(原任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두전(頭篆)하였다. 입석 연대는 ‘숭정기원후삼계유월일립(崇禎紀元後三癸酉月日立)’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1753년(영조 29)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비신 68×245×68㎝, 비좌 123×124×63㎝, 기대석 183×184㎝, 전체 높이 387㎝이다.
비문 내용은 먼저 비제와 더불어 찬자·전·서자를 밝히고, 세종대왕 후손으로서의 가계와 출생·급제·관직생활 및 주요 행적과 업적을 밝히고 있다. 특히 지방수령으로서의 활동과 진휼사업, 한성부 송금(松禁) 사업, 군정과 관련하여 양역변통 활동, 언론활동과 더불어 도성수축 및 북한산성·탕춘대성 축조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어 임종과 장례, 비명 마련 과정과 명문(銘文) 및 자손관계를 밝히고 있다.
[현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에 속해 있어, 묘역과 더불어 잘 보전되어 있다. 특히 궁중요리를 선보이는 필경재(必敬齋) 가까이에 있어, 관광자원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사각기둥 비신에 옥개형 4면비의 양식을 갖추고 있고, 이유의 행적과 가족 및 후손 관계 및 신도비가 세워지기까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북한산성 축조와 양역 관계 및 호포 등 국가재정 운영의 여러 모습을 싣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