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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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濟衆院五層石塔-標石-石燈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2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호선 |
제작 시기/일시 | 1923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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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8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2008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1월 2일 - 불교제중원 오층석탑 및 표석, 석등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불교제중원 오층석탑 및 표석, 석등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장처 | 불교제중원 오층석탑 및 표석, 석등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29[개포 2동 152] |
원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경운궁 선원전터 |
성격 | 표석|석탑|석등 |
재질 | 돌 |
크기(높이) | 오층석탑 212㎝ |
크기(길이) | 표석 138㎝ |
크기(너비) | 석등 78㎝ |
소유자 | 경기여고 |
관리자 | 경기여고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경기 여자 고등학교 안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세운 오층석탑과 불교제중원(佛敎濟衆院) 표석 및 석등.
[개설]
불교제중원은 1923년 9월 1일 서울 정동 불교중앙포교소 안에 준공된 불교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해인사(海印寺) 말사(末寺)인 불교중앙포교소는 1910년 경운궁 선원전터에 세워졌고, 불교제중원은 1923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1862~1933]에 의해 설립되었다. 상궁 천일청(千一淸)이 막대한 시주를 했고, 전 대한적십자병원의 기계를 도입하여 외과, 내과, 조산과를 갖추고 환자를 진료하였으나 이회광의 개인적 사업으로 추진된 바가 있어 전체 불교계의 후원을 받지 못했고, 경영상의 곤란으로 1924년 10월 28일 휴업에 들어가 이듬해 폐지되었다. 표지석과 석탑, 석등은 모두 불교제중원이 설립되면서 조성된 것으로 제중원 폐지 이후 정동에 경기여고가 설립되고 정동 교지가 확장되면서 학교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2008년 경기 여자 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학교 공원화사업 과정에서 교정에 있던 표지석, 석등, 석탑을 해체해 땅에 묻었다가 문제가 되어 근대불교문화재로 보존하기로 하고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오층석탑은 석등과 앞뒤로 배치된 교사 건물 사이에 마련된 작은 정원에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표석은 앞쪽에 세워진 교사 한쪽 작은 정원에 있다. 문화재로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1월 2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표석은 한면에 세로로 ‘불교제중원(佛敎濟衆院)’이라고 음각했는데, 서체가 매우 유려하다. 표석은 상부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 형태로 치석된 사각형 기둥으로 명문이 새겨지지 않은 다른 면에 사각형 홈이 마련되었으며, 상면에도 낮게 사각형 홈이 마련되었다. 따라서 이 표석은 원래 기둥을 올리는 초석으로 사용되던 돌을 재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방형의 탑신이 올라간 형태로 탑신부의 체감은 완만한 반면 옥개석은 매우 두꺼워 둔탁한 느낌을 준다. 처마 네 귀퉁이의 전각은 급격한 반전을 보이고 있고, 상륜부는 복발 1석으로 조성했다. 간략한 치석과 결구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치석 수법이 깔끔하지 못하여 석탑건립이 적었던 일제 강점기 양식을 여실히 보이고 있어 불교제중원 설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소형의 석등은 원래의 부재가 모두 남아 있는지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다만, 현재는 평면 6각의 화사석에 육각의 옥개석이 올려 져 있는 형태로 석탑과 마찬가지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특징]
오층석탑은 전통적인 한국석탑의 흐름을 잇고는 있으나 매우 둔중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석등은 6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간주석의 모양도 독특하여 전통양식에서 벗어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불교제중원은 비록 1년 정도 밖에 운영되지 못했고, 당시 대표적인 친일승려였던 이회광이 설립 운영했으나 1910~1920년대 불교근대화 운동의 일환으로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도심포교당 건립, 야학, 빈민구제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불교제중원 표석은 근대불교사의 자료로 의미를 지닌다. 오층석탑은 전통적인 석탑을 계승하되 단순한 모양으로 조성되었고, 석등은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두 유물은 조성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근대 불교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