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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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濡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나각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645년 - 이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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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721년 - 이유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723년 - 묘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2월 5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 |
현 소재지 | 이유 묘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 31길 20[수서동 산10-1] |
성격 | 능묘 |
양식 | 단분합장(單墳合葬) |
관련 인물 | 이유|송시열|광평대군 |
소유자 | 광평대군파 종중 |
관리자 | 광평대군파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李濡)의 무덤.
[개설]
이유[1645~1721]의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다. 이후재(李厚載)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군수 중휘(重輝)이며, 할아버지는 형(逈)이고, 어머니는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이단하(李端夏)·민정중(閔鼎重)의 아낌을 받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민진후(閔鎭厚) 등과 친하였다. 1721년 7월 27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예에 따라 조회를 파하고 3년간 녹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광주 광수산 선영의 해좌(亥坐)의 언덕에 예장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묘지(墓誌)를 썼으며, 1727년(영조 3) 민진후와 함께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혜정(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753년(영조 29)에 손자 이시중(李時中)이 권상하에게 비명(碑銘) 짓기를 부탁하여 신도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유는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헌납·정언·지평·교리·수찬·응교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경상도 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94년 갑술환국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702년 양역(良役) 사무에 밝아 특별히 병조판서로 임명되면서 이듬해 설치된 양역이정청 구관당상을 겸임, 양역변통문제를 담당하였다. 그 뒤 1704년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통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 군포균역급해서수군변통절목(軍布均役及海西水軍變通節目), 교생낙강자징포절목(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마련해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양역 사무를 크게 정비하였다. 그 공으로 1704년 우의정에 오르고, 뒤이어 좌의정·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삼정승으로 있으면서 특히 도성 방어의 강화를 힘써 주장, 경리청(經理廳)이라는 재정 마련의 특별기구까지 설치해 가면서 일부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의 수축을 완료하였다. 1718년 영중추부사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경세가로서 양역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호포론(戶布論)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군문·군액의 조정과 감축, 군포 부담의 균일화와 같은 점진적인 개선책과 교생·원생(院生) 등의 명목으로 피역하는 자[閑游者]에게 군포를 거두는 유포론(游布論)[校生贖布論]을 주장하였다.
[위치]
광평대군파 묘역 내 남동단 전통가옥 필경재와 접해 있다.
[형태]
묘는 단분합장(單墳合葬)이고, 좌향(坐向)은 남향이다. 묘비·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문석인과 별도로 신도비를 갖추고 있으며, 묘비는 옥개형(屋蓋形) 4면비이다.
[금석문]
묘비 앞면에 ‘유명조선국영의정증시혜정이공휘유지묘 정경부인함종어씨부좌(有明朝鮮國領議政贈諡惠定李公諱濡之墓 貞敬夫人咸從魚氏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입석연대는 ‘숭정기원후구십육년계묘오월일각(崇禎紀元後九十六年癸卯五月日刻)’으로 새겨져 있어 1723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어유봉(魚有鳳)이 짓고, 이현필(李顯弼)이 썼다. 크기는 옥개석 110×65×38㎝, 비신 65.5×150×31㎝, 비좌 110×74×38㎝이다.
[현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에 속해 있어, 묘역과 더불어 잘 보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삼정승을 지낸 인물의 묘역으로 당대 사대부의 묘제와 상설 연구에 귀중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