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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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最中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산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나각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715년 - 이최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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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784년 - 이최종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797년 - 묘표 세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2월 5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 |
현 소재지 | 이최종 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산 1 |
성격 | 능묘 |
양식 | 단분합장(單墳合葬) |
관련 인물 | 이최중|이현응|이유 |
봉분 크기/묘역 면적 | 옥개석 95×73×44㎝|비신 56×139×31㎝|비좌 110×81㎝ |
소유자 | 광평대군파 종중 |
관리자 | 광평대군파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최중(李最中)의 무덤.
[개설]
이최중[1715~1784]의 자는 인부(仁夫), 호는 위암(韋菴)으로 아버지는 현감 이현응(李顯應)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744년(영조 20) 사마시에 급제한 뒤, 175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서·홍문관교리·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55년에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찬집낭청(纂輯郞廳)으로 참여하였다. 경연에서 수령 임용방안을 진언하면서, 세력 있는 자는 피폐한 고을, 세력 없는 자는 좋은 고을에 임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여 포상을 받았다.
1756년 강원도어사가 되어 수령들의 치적을 살폈으며, 이정어사(釐整御史)로 다시 파견되어 그 지방의 여러 폐해를 교정하고 돌아왔다. 후에 삼척 부사 재임 때 올린 「진삼척민폐소(陳三陟民弊疏)」에서도,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의 어려움이 절정에 달하여 유망민이 속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공물(貢物)과 환곡(還穀)의 징수는 현지 실정에 맞추어 재조정할 것을 촉구하는 등, 특히 농민생활의 안정에 관심이 깊었다.
1757년 이후 응교·삼척부사·대사간·이조참의·부제학·예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770년 『문헌비고』 편찬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노론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우참찬을 끝으로 1773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2년(정조 6) 이유백(李有白)의 대역부도죄 사건에 친척으로 연좌되어 영암 추자도에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순조 때 신원되었으며, 저서에 『위암집』 6권 3책과 『환범옹만록(換凡翁漫錄)』 10책이 있다.
[위치]
강남구 수서동 산 1에 위치해 있다. 수서동 동익아파트 802동 건너 맞은 편에 있는 소로를 따라가면 경작지가 있다. 이 경작지 끝나는 지점에서 산 사면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묘가 나온다.
[형태]
묘는 단분합장(單墳合葬)이고, 좌향(坐向)은 북향이다. 묘표·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으며, 묘표는 옥개형(屋蓋形) 3면비이다.
[금석문]
묘표 비신 앞면에 ‘조선의정부우참찬치사봉조하위암이공휘최중지묘 정부인함안조씨부좌(朝鮮議政府右參贊致仕奉朝賀韋菴李公諱最中之墓 貞夫人咸安趙氏祔左)’라고 새겼다. 입석연대는 ‘숭정기원일백칠십년정사계춘립(崇禎紀元一百七十年丁巳季春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179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아들 이의병(李義秉)이 짓고, 외손 홍우섭(洪遇燮)이 썼다. 크기는 옥개석 95×73×44㎝, 비신 56×139×31㎝, 비좌 110×81㎝이다.
[현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에 속해 있어, 묘역과 더불어 잘 보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