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801618
한자 高等學校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강남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민진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고등 보통 교육 및 실업 전문 교육 기관.

[개설]

우리나라 교육법에 규정된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은 일반계 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방송통신고등학교, 산업체부설 고등학교 등으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일반계[인문계 고등학교]와 실업계[농업고등학교·공업고등학교·상업고등학교·수산고등학교·해양고등학교·실업고등학교·종합고등학교]로 나눌 수 있다.

교육과정은 보통교과와 전문교과로 구분된다. 보통교과에는 국민윤리·국어·국사·사회·수학·과학·체육·교련·음악·미술·한문·외국어·실업·가정 등 13개 교과와 교양 선택 교과로 편성된다. 전문교과는 농업·공업·상업·수산업·가사·실업·과학·체육·예술에 관한 교과로 편성된다. 중등교육기관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5년제 중학교가 중등교육을 대표했지만, 1946년 11월 조선교육심의회에서 6-3-3-4제의 학제를 제안하면서 3년제 고등학교 교육이 독립되었다.

해방 당시의 고등학교 교육의 규모를 살펴볼 수 없다. 다만, 『한국교육 10년사』에 1952년 고등학교수 342개교, 학생수 12만 3041명이라고 나와 있을 뿐이다. 해방 이후의 일반계 고등학교는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교육열 때문에 급격히 확대되어 왔다. 이와 함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 또한 심해져서 1973년에는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률이 34.7% 정도에 머물렀고,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부터 67.6%로 증가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야 90%를 넘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으로 고등학교 교육이 양적으로 팽창했다. 그렇지만, 교육여건이 열악하게 되었고 대학교 지원자가 급격히 늘어남으로써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1980년 7월 30일에 발표된 ‘학교교육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대책’[일명 7·30교육개혁조치]은 이러한 고등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대학입시를 변화시킴으로써 해결하려 한 대표적인 예이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크게 인문사회·자연·직업과정으로 구분되며, 각 과정마다 공통필수과목[12개]와 과정별 선택과목[공통, 선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장은 인문사회계열의 16단위, 자연계열의 12단위를 재량으로 조정할 수 있고, 고등학교 총 이수단위는 204~216단위이다. 일반계 고등학교가 일관되게 확대한 것과 달리, 실업계 고등학교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고, 1963년 ‘산업교육진흥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는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강남개발 구상과 명문고등학교의 강남이전]

1966년 1월 초순, 서울특별시는 이른바 ‘강남개발 구상’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강남지구 사업계획은 66년 안에 3백만 원을 들여 도시계획의 최종안을 완성할 예정이다. 매년 약 3억 원 씩 10개년계획으로 총 30억 원의 자금을 들여 시행할 이 도시계획은 1km 사방으로 길을 뽑고 주택지 각 블록 안에는 초등학교와 시장·공원·상하수도 시설 등을 미리 마련하게 된다.”[『조선일보』 1966. 1. 7.]

구자춘 시장은 3핵 도시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초기, 즉 1975~76년경부터 이들 명문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남개발을 좀 더 효율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에서도 그럴 필요가 있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고등학교들의 종로구·중구 편재는 당연히 시내교통의 큰 장애요인이 되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많은 고등학교들이 종로·중구에서 등하교하는 것은 대중교통수단을 혼잡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구자춘은 역대 시장 중에서도 막강한 힘을 가진 시장이었고 동시에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의 당연직 의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힘이 있기는 했지만 명문고등학교들을 강제로 이전시킬 수 없었다. 중앙정부 고관들과 그 부인들이 대개는 명문학교 출신이었고, 경제계를 비롯한 각 방면의 지배층·여론형성층이 명문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들 명문학교 출신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와 교정이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였고 젊은 날에 대한 향수 바로 그것이었다. 명문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옮긴다는 일이었으니 그로 인한 여론의 반대와 저항을 구 시장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론의 저항은 종로구 화동에 있던 경기고등학교강남구 삼성동 91번지로 옮길 때 강하게 나타났다. 1900년 10월 3일에 고종의 칙명으로 ‘관립 한성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학교의 일제 강점기 때 이름은 제일고등보통학교였다. 학교이름이 ‘제일’이었듯이 광복 전후를 통해서 이 나라 제일의 명문학교이었으니 당연히 이 나라 최고의 영재들이 모이는 학교였다. 문교부 장관이 종로구 화동에 있는 경기고등학교를 6억 9,600만원을 들여 3개년계획으로 영동 제2구획정리지구 1공구 221-1에 옮긴다고 발표한 것은 1972년 10월 28일이었다. 대지 1만 1천 평에 옮긴다고 발표한 것은 1972년 10월 28일이었다. 대지 1만 1천 평에 낡을 대로 낡은 교사 대신에 3만 2,253평이나 되는 넒은 대지에 근대식 시설을 갖춘 새 교사를 국고보조까지 해서 신설 이전한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이른바 유신헌법이 발표되어 제3공화국이 제4공화국으로 바뀐 것은 1972년 10월 17일이었다. 국회가 폐쇄되고 입법권은 비상국무회의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언론은 사전검열을 거쳐야 했다. 정부가 결정 발표한 것에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그런 때의 발표였다. 앞으로 단행할 고교평준화 시책에 앞서 소위 일류 중의 일류학교라는 개념부터 바꿔보려는 정부의 강한 의지를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영단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 재학생은 물론이고 졸업한 동문들의 반대가 비등했다. 국내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재외동문까지 합세하여 강한 반대여론이 형성되었다. 각계에 포진한 경기고등학교 동문들의 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재미동문 중에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대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에서는 한번 뺀 칼을 다시 칼집으로 넣을 수 없었다.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화동의 교사는 허물지 않고 말끔히 개수하여 도서관으로 쓰겠다. 교정도 단장하여 도서관 뜰도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이 타협안으로 반대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중앙정부의 사실상 패배였다.

경기고등학교강남구 삼성동 91번지에 새로 지은 교사로 옮겨난 것은 1976년 3월부터였다.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가 그 교사를 현대그룹에 팔고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길 것을 결정한 것은 1976년이었다. 1906년에 휘문의숙으로 출발하여 7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강남구 대치동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해간 것은 1978년 1월이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과당경쟁을 없애기 위한 고등학교 추첨입학제, 평준화시책이 발표된 것은 1973년 2월 28일이었다. 1974년도 고교입시부터 우선 서울과 부산에서 심지 뽑기 입학이 실시되었고, 1975년에는 대구·인천·광주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교평준화가 실시되고부터는 종로구와 중구에 있던 많은 중·고등학교가 강남 이전을 희망하게 되었다. 교사와 시설도 낡았고 교지가 협소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장이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을 희망했고 또 해당 학교들도 강남 이전을 희망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문제는 아니었다. 경기고등학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문들의 저항이 염려되었고, 또 강남으로 신축·이전을 한다 한들 당장에 땅 값, 건물 값을 마련할 방법도 막연한 것이 현실이었다. 구자춘 시장은 대통령의 권위를 빌리기로 결심했다. 1978년 서울특별시 연두 순시에서 서울시장은 미리 교육감과 상의하여 ‘강북 각급 학교의 강남 이전’을 대통령 지시사항에 포함해달라는 상달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네 가지였다. 그리고 그 네 번째가 ‘강남지구 학교유치 권장’이었다. 서울시의 각급 학교 대부분이 강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들 중 많은 학교가 강남 이전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강남 이전을 희망하는 학교에 대하여는 행·재정적인 지원을 해서 가능한 한 많은 학교가 이전되도록 해야 하겠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 1978년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1980년에는 숙명여자중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강남구 도곡동 91번지로 옮겼고,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 서초동 1,526-1번지로 옮겨갔다. 1984년에는 중동중학교중동고등학교강남구 일원동 618번지로 옮겼다. 1986년에는 동덕여자중학교와 동덕여자고등학교가 서초구 방배동 산 82번지로 옮겨갔다. 경기여자고등학교강남구 개포동 152번지로 옮겨간 것은 1988년 2월 9일이었다. 1989년에는 성동구 군자동에 있었던 서울세종고등학교강남구 수서동 새 교사로 옮겨갔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지난날의 명문학교들이 옮겨간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강남에는 또 수많은 새 학교들이 설립되어 모두가 명문화해갔다. 아무리 평준화되었다고 해서 학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까지 평준화 될 수 없었다. 하나같이 신설학교였기 때문에 시설도 월등하게 좋았고 교사들의 질도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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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던 강남 지역의 경우 강북에 소재했던 전통적인 우수 고등학교의 유치로 새로운 교육환경이 조성되고 계층적으로 상층집단이 집중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강남 지역에 소재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 이전에는 이사를 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집중현상을 보여주었다.

[현황]

강남구에는 총 21개의 고등학교[국악고등학교, 개포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압구정고등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 서울세종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영동고등학교, 은광여자고등학교, 중동고등학교, 중산고등학교,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진선여자고등학교, 청담고등학교, 현대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서울로봇고등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가 있다.

이중 국립고등학교 1개교, 공립고등학교 6개교, 사립고등학교 14개교이다. 남자고등학교가 7개교[경기고등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영동고등학교, 중동고등학교, 중산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가 4개교[경기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은광여자고등학교, 진선여자고등학교], 남녀공학은 10개교이다. 수업교사1인당 학생수는 17.1명으로 서울시 평균 16.1명과 전국 평균 16.4명 보다 높다. 특히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의 수업교사 1인당 학생수가 21.4명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국악고등학교가 6.1명으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강남구의 직원1인당 학생수는 79.3명으로 전국 49.8명, 서울특별시 75.8명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히 사립고등학교인 영동고등학교[180.3명],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175.1명], 은광여자고등학교[174.4명]가 높게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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