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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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주혁 |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경기도 가평군의 역사.
[개항기]
경기도에 소속된 가평군은 1888년(고종 25)에 강원도 춘성부(春城府)에 편제되었다. 1894년에 이르러 다시 경기도로 환속되면서 포천군(抱川郡) 소속으로 바뀌었다. 1895년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을 23부로 337군으로 개편되었을 때, 가평군은 5월 26일 한성부에 편제되었다. 같은 해 7월 19일 ‘가평군·포천군 합병의 건’으로 가평군은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이어진 단발령 시행으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가평 지역에서는 가평 지역에 한정한 독자적 활동 혹은 인근 지역과 연합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가평 출신인 이충응(李忠應), 신재희(申在喜), 신경홍(申敬弘) 등이 고을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보내어 춘천 지역 의병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한 뒤 춘천 남면 창촌리 이소응(李昭應)을 찾아가 합류하였다. 가평과 춘천의 의병이 결합하여 1896년 2월 가평 보납산에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제도 관제 개정에 따라, 기존의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로 분할하면서 가평군은 경기도로 편제되고 포천군 소속에서 다시 가평군으로 독립했다.
대한제국기 가평 사람들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었고, 물자와 사람의 유통 경로는 전근대 시기에 이용된 북한강 수로와 나루가 크게 활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전후 가평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살펴보면,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한 조병세(趙秉世)의 순국과 1919년 3월 15~16일 북면에서 전개된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가평군 관내의 주목할 만한 사건은 백백교사건이 있다. 백백교는 전용해(全龍海)가 1923년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서 창설한 종교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1928년부터 수많은 신도들을 살해하다가 1937년 일본 관헌에 적발되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에 혹세무민의 교리는 불안한 현실을 탈피하려는 일반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38년 1월 1일 기존 가평군의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명되었고, 1942년에는 기존 양평군에 소속되었던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편입되었다. 1940년대 청평수력발전소 건립과 운영에 따라 남면의 달전리·이화리·산유리·복장리·금대리는 가평면으로, 고성리·호명리는 외서면으로 편입되면서, 이때부터 남면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