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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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 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신용균 |
[정의]
1910년~1945년 일제의 식민 통치와 거창 지역민의 대응, 지역 사회 변천사.
[개설]
거창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기로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때였다. 당시 대다수의 지역민들은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생존권까지 위협당해 절대 빈곤의 상태에 빠졌다. 해방 전까지 거창 전체 인구 중 30% 이상의 주민이 해외로 이주해야 했던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일제의 지배와 거창의 변화]
1910년대 일제는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통치 기구는 군청, 경찰서와 헌병대, 재판소, 세무서, 우체국 등이었다. 거창의 행정 조직은 1914년에 개편되었다. 이때 거창군은 기존의 거창군 지역에 마리, 위천, 북상, 그리고 신원 지역을 통합하여 현재와 비슷한 군의 범위가 형성되었다. 이후 면이 통합되어 1927년 13개 면, 1937년 1읍과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현재는 1읍 11개 면이다. 지방관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10여 명의 군수가 차례로 파견되었는데 모두 조선인이었고, 그 아래 면장과 구장이 있었다. 일제는 무장 기관으로 거창읍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각 면에 경찰 주재소를 두었으며, 거창 헌병 분대는 함양, 합천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거창 경찰서장은 모두 일본인으로 임명되었다. 거창의 토지 조사 사업은 1915~1916년에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 거창의 변화는 매우 컸다.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고, 향촌 세력이 교체되었으며, 근대 경제가 등장하고, 근대 문물이 보급되었다. 그 변화는 왜곡된 형태의 근대성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일제의 정책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일제의 지배 정책에 대해 저항하거나 침묵, 관망, 타협하면서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3·1운동과 지역 유지의 등장]
1919년 거창의 3·1 운동은 가조와 위천에서 일어났다. 그해 3월 20일 가조 장날 오후 가조 장터에서 5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고,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어서 3월 22일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거창으로 진출하던 중 살피재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하였다. 위천에서는 4월 8일 위천 장날 거사하여 만세를 부르고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유림, 승려, 기독교인들도 다른 형식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그해 3월 거창의 유림은 곽종석을 중심으로 파리 장서 운동을 벌였으며, 8월 거창읍 교회 신자였던 오형선, 주남선 등은 만주에 독립군과 독립 자금을 보냈고, 거창 출신 해인사 승려 박달준, 김봉률 등은 해인사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거창 출신 신종범은 일본 유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가한 후 만주로 가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중 전사하였다.
3·1 운동 후 일제가 한민족을 회유하고자 ‘문화 통치’를 실시하자 지역의 유력 인물들은 근대적 기업을 경영하고 지방 의회에 진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거창의 면 협의회·읍회·도 평의회 선거는 1920년, 1923년, 1926년, 1929년, 1931년, 1935년, 1939년에 각각 실시되었는데, 여기에서 선출된 주요 인물들은 거창의 지역 유지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중에서 위천면 협의회원, 경상남도 회원, 중추원 고문을 지냈던 정태균은 거창을 대표하는 지역 유지였다. 1925년에 조직된 제창회, 1926에 재조직된 거창 번영회는 대표적인 거창의 유지 단체였다. 거창 유지들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한편 지역 분쟁 시 지역민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반면 지주들은 거창 군수가 주관하는 지주 간담회·군농회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1920년대 이후의 사회 운동]
1920년대 거창의 대중들은 활발하게 지역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들은 1920년 주남재를 중심으로 거창 청년회를 조직하고, 1926년 청년 회관을 건축했다. 또한 무상 아동에 대한 교육 기관인 보성 학교를 운영하였고,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했으며, 연설회, 강연회 등 다양한 계몽 활동을 벌였다.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인물들의 등장으로 거창 청년회는 1930년 거창 청년 동맹으로 재창립되었다. 농민들은 부당한 지세 징수, 고율의 소작료에 대해 소작 쟁의를 벌였고,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농민 조직 건설 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형평 운동으로 1923년 조선 형평사 거창 분사와 1926년 거창 형평 청년회가 창립되었다. 1927년 10월 22일 신간회 거창 지부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인사뿐만 아니라 일부 거창 유지들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운동은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1930년대 일제는 대륙 침략을 시작하면서 농민에 대한 수탈과 지역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농민들은 소작 쟁의를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히 탄압당하였다. 1931년 가조 소작농 조합 결성 사건, 1936년 가조 소작 쟁의, 1937년 대규모 소작 쟁의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사방 공사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만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다. 당시 일제 경찰은 농민 운동을 한층 강하게 탄압하여 1931년 11월 신희종 등 8명을, 1932년 10월 함옥정 등 18명을 잇따라 검거하였다. 이때 신희종은 자결하였고 신병항과 신성은 중국으로 떠나 의열단과 애국단에 각각 입단하였다.
1937년 이후 일제는 각종 어용 단체를 조직하여 지역민들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였다. 일제는 거창에서 1937년 국방 의회, 1938년 청년단, 1940년 지주회, 1940년 유도회 등의 단체를 창립하고, 이들을 동원하여 신사 참배, 창씨 개명, 국방 헌금 모금, 지원병 모집, 징용 동원, 공출 등 전시 행정을 강행하였다. 이때 거창읍 교회 주남선 목사는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거창 출신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으니, 장부희, 유몽룡, 전사옥, 신숙범, 김상훈 등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강점기 거창의 경제와 문화]
일제강점기 거창의 경제는 여전히 농업이 중심이었지만 상공업도 꽤 발달하였다. 제조업은 양조업이 중심이었고, 상업은 1927년 거창 시장이 현 위치로 이전 개장한 이래 크게 발달하여 매출고가 경상남도 4~5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거창의 상권은 외지인의 침투를 받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남방의 개성’이라고 불렸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정종여, 김상훈과 같은 빼어난 지역 출신의 화가와 시인을 배출했지만, 지역민들이 가장 열정을 보인 것은 교육 분야였다. 1910년대 거창 보통학교, 위천 보통학교가 설립된 후 지역민들은 끊임없는 학교 설립 운동, 학급 증설 운동을 벌여 1930년대 초에는 각 면마다 보통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에는 중등학교 설립 운동을 벌이고 설립 자금을 모아 1928년 2년제 거창 농립 보습 학교를 열었고, 다시 4년제 농업 학교 설립 운동을 벌여 1944년 마침내 거창 공립 농업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지역민들은 진주, 대구, 김천을 잇는 도로 개설과 전기, 전화 등 근대 문물의 도입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일제강점기 거창 사람들은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매우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활동력을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