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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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福樞 |
이칭/별칭 | 경하(景遐),사미헌(四未軒),녹리산인(甪里山人)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815년 - 장복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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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0년 - 장복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5년 - 사미헌 장 선생 유적비 설립 |
출생지 | 장복추 출생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
거주|이주지 | 장복추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
묘소|단소 | 장복추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인동(仁同) |
[정의]
조선 후기 거창에 우거하였던 문인.
[가계]
장복추(張福樞)[1815~1900]의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경하(景遐), 호는 사미헌(四未軒)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8대손이다. 아버지는 사인(士人) 장굉(張浤)이며, 3세 때 할아버지인 각헌(覺軒) 장주(張儔)의 명으로 큰아버지 장관(張寬)에게 입양되었다. 1831년(순조 31)에 황호선(黃浩善)의 딸 장수 황씨(長水黃氏)와 결혼을 했으나, 1835년(헌종 1)에 장수 황씨가 죽자 이듬해에 채국표(蔡國標)의 딸 인천 채씨(仁川蔡氏)와 재혼하였다.
[활동 사항]
장복추는 1815년(순조 15)에 외가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개안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각헌 장주에게 배웠으며, 성장해서는 일정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1881년(고종 18)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어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 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초야에 머물면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1834년(헌종 5)에 옥동 서원(玉洞書院) 강회(講會)에 참석을 하고, 1845년(헌종 11) 모원당(慕遠堂)에서 강학(講學)하는 등 각종 강학과 강회를 다녔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하여 1890년(고종 27)에 강학소로 녹리 서당(甪里書堂)을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 건립하였다. 장복추는 1871년(고종 8)에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모시던 우산 서원(愚山書院)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철폐되자 그 복건(復建)을 위한 상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로 상경까지 하였다. 또한 1884년(고종 21) 의제 개혁(衣制改革)이 시행되자 즉시 이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릴 만큼 유학의 전통성 유지와 실천에 힘쓴 정통 유학자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터져 당시 인동의 유생들이 찾아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니, 한갓 의분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는 뜻도 이루지 못하고 무고한 생명만 희생될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81세 때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당동(唐洞)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광무 4)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장복추의 저서로는 『사미헌집(四未軒潗)』이 있으며, 성리학의 기본적인 쟁점에 속하는 태극의 개념 파악을 주목한 『태극도설 문답(太極圖說問答)』이 있다. 또한 사부모(事父母), 우형제(友兄弟) 등 9조목에 걸쳐 제가(齊家)의 주요 문제를 뽑아 그 실천 방안을 제시한 『훈몽 구잠(訓蒙九箴)』이 있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숙흥야매잠」에 관련된 주해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집약한 뒤에 정리하여 퇴계의 철학을 심화·발전시킨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이 있다. 「훈몽 요해(訓蒙要解)」, 「동몽훈(童蒙訓)」, 그리고 「삼강록간보(三綱錄刊補)」 등은 어린이들의 윤리 도덕 교육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것이다.
[묘소]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 장복추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에 사미헌 장 선생 유적비가 1985년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