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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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穰錫 |
영어공식명칭 | Byeon Yangseok |
이칭/별칭 | 명원(鳴遠),구당(苟堂)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58년 - 변양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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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변양석 파리 장서 서명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 변양석 파리 장서 운동 전개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파리 장서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 변양석 건국 포장 추서 |
출생지 | 변양석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
거주|이주지 | 변양석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
활동지 | 변양석 활동지 - 경상남도 거창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자 |
대표 경력 | 파리 장서 서명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변양석(卞穰錫)[1858~?]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명원(鳴遠), 호는 구당(苟堂)이다.
[활동 사항]
변양석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에 활동하였던 거창 지역 유생으로, 윤주하(尹胄夏)와 장복추(張福樞)에게서 배웠다. 거창군 남하면의 윤주하는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으로 곽종석(郭鍾錫)과 동문이었다. 경상북도 예천 출신의 장복추는 81세 때 거창군 가조면으로 이주하여 이진상-곽종석 학맥과도 빈번히 교류하였다. 따라서 변양석과 곽종석은 그 학맥에 있어서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변양석은 1919년 곽종석과 그 문인들이 쓴 독립 청원서[파리 장서]에 거창 지역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전국의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받은 이 청원서를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이 상해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김창숙은 직접 파리로 가는 대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여 제출케 하였다. 이른바 ‘파리 장서 운동’이다. 이로 인해 청원서에 서명한 유생들이 대거 검거되어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공훈이 인정되어, 1995년 변양석에게 건국 포장이 수여되었다. 파리 장서의 발상지인 거창에서는 1977년 거창읍 상림리 옛 침류정 자리에 ‘파리 장서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