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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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凰臺詩 |
영어음역 | Bonghwangdaesi |
영어의미역 | Poems of Bonghwangda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권태을 |
배경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8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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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한시 |
작가 | 유호인|박필문|이성순|이면승|정대용|정종원 등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 감회를 읊은 시.
[개설]
「봉황대시(鳳凰臺詩)」는 유호인, 박필문, 이성순(李性淳), 이면승(李勉昇), 정대용, 정종원 등이 김천시 교동 820-1번지 연화지(蓮花池) 가운데에 있는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시흥(詩興)을 읊은 한시이다. 금릉(金陵)[현 김천] 봉황대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사방 3칸,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나지막한 건물이지만, 김천 시내에서는 오직 하나 남은 옛 건물이다. 면적은 35.64㎡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 제29권 김산조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 공정왕(恭靖王)[정종]의 어태를 황악산에 묻고 현을 군으로 승격시킬 때 김산의 별호를 금릉으로 삼았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김산의 지형이 중국 금릉[오(吳)·동진(東晋) 이래의 6국의 수도, 현재의 남경]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봉황대의 조성은 이백(李白)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기록상 금릉에 봉황대가 생긴 것은 군수 윤택[재임 1707~1711]에 의해서이다. 꿈에 연화지의 읍취헌(挹翠軒)으로 봉황이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읍취헌을 봉황루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금릉 봉황대가 남송 때 왕의가 꿈에 봉황이 산에 모인 것을 보고 봉황대를 축조했다는 설화와 구조가 같다.
군수 김항주(金恒柱)가 1771년에 봉황루를 봉황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9년에 군수 이성순이 개건(改建)하였다. 1838년에는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연화지 가운데로 봉황대를 옮겨 지도(池島)를 셋으로 조형하여 삼산(三山)을 만들었으니,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에 ‘삼산이수(三山二水)’란 시어가 있어 이를 재현하려 한 것이라 하겠다. 봉황대에 오른 사람이라면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를 연상치 않을 이 없겠지만, 김천의 「봉황대시」는 그 주제 의식면에서 이백의 것과 전혀 다름을 먼저 밝혀 둔다.
향토인 외에도 「봉황대시」의 작자가 많을 것이나, 여기에서는 향토사에 오른 시인만 소개한다. 기록상 최초로 임계(林溪) 유호인이 연화지 관련 시를 남기었고, 군수 박필문·이성순·정종원, 관찰사 이면승, 순찰사 정대용 외 6인이 봉황대와 관련된 시를 창작하였다. 여기에서는 1792년에 개건하고 「봉황대시」를 남긴 이성순의 시와 이 시에 차운(次韻)한 영남 관찰사 이면승의 시를 살피도록 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들도 주제 의식면에서 이들 두 시와 대동소이함을 밝혀 둔다.
[구성]
이성순의 「봉황대시」는 칠언율시로 되어 있고, 그의 아들 관찰사 이면승은 이 시를 차운하였다. 이백의 「등금릉봉황대」가 7언 고풍(古風) 단편(短篇)인 점에서 이성순·이면승 부자의 두 시는 이백과 시체를 달리하였다.
[내용]
1. 이성순의 「봉황대시」
우뚝 솟은 용마루는 뭇 산이 에워싸고/ 두 물줄기 교묘히 합쳐 절로 에둘렀네/ 밝은 가을 달은 푸른 못 너머 떴고/ 십리에 돌아가는 중은 단풍 숲 사이에 있네/ 백성 근심 요사이 넘치나니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우선 술잔을 잡고 잠깐 얼굴을 펴네/ 죽루에서 기꺼이 내년을 위한 계획을 하여/ 후인에게 남겨주니 소장(訴狀) 다스릴 일 한가하길[特立危甍擁衆山 雙流巧合自成環 一輪秋月碧潭外 十里歸僧紅樹間 可耐民憂方溢目 且將樽酒暫開顔 竹樓肯爲明年計 剩借來人吏諜閒].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이 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미련[7·8구]의 ‘죽루(竹樓)’란 시어(詩語)에 잘 나타나 있다. 봉황대 위의 누각을 죽루로 표현한 것은 송나라의 명신 왕우칭(王禹偁)이 황주의 수령이 되어 죽루에서 선정을 베푼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함에서였다. 그러기에 이 시는 봉황대를 새로 세워 승경을 마련한 사실은 두련[1·2구]과 함련[3·4구]에 모두 그려 놓고, 경련[5·6구]으로 상(想)을 전환시켜 작자의 시점을 고통 받는 백성의 현실을 보게 하였다. 이 같은 전환은 결론을 유도하는 단계가 되어 봉황대의 존재 가치를 시어 밖에 은근히 암시해 놓았다. 곧 봉황대는 단순한 유상처가 아니라 번다한 공무를 맑은 정신으로 공평무사하게 처리할 목민관이 이신양성(頤神養性)[정신을 수양하고 원기를 보양함]하는 세심(洗心)의 공간임을 암시한 것이라 하겠다.
맑은 가을에 멀리 뻗친 뭇 산을 보니/ 산이 처마와 나란히 하늘과 맞닿았네/ 달뜨자 마루 상하가 환하게 밝아/ 난간에 기대니 완연히 물 가운데 든 듯하네/ 봉황이 둥지를 옮겨 새 그림을 펼치니/ 고기는 다락 풍광을 즐기며 옛 모습을 신선케 하네/ 돌아간 뒤는 분명 꿈에도 못 잊어 힘들겠지만/ 우선은 피리·북 잡고 한가로운 날 즐기리[淸秋遠勢見群山 山與簷齊天一環 得月通明軒上下 凭欄宛在水中間 鳳移巢穴開新畫 魚戱樓光鮮昔顔 歸後定應勞夢想 且將簫鼓日偸閑].
이 시의 개요를 보면, 1·2구에서 봉황대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다. 3·4구에서는 그 속의 사람도 물아일체의 지경에 든다. 5·6구에서는 봉황대를 개건하여 풍광이 배가되었다. 7·8구에서는 잠시라도 세심의 시간을 더 누리고 싶다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 시는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가 공존한다. 표면적 의미로 보면, 봉황대가 승경이 된 것은 개건의 덕임을 강조하는 주제 의식에서 쓰였다. 그렇지만 이면적 의미로 보면, 봉황대가 선정을 지향하는 목민관의 세심 공간이라는 주제 의식에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외(言外)에 묵시적으로 펼쳐 놓았다. 이 시는 부친이 이룩한 봉황대 개건이 금릉의 풍광을 더하였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목민관의 세심에 있음을 아들도 깨닫고 차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의 개요를 보면, 1·2구에서 봉황대인데 봉황은 없다. 3·4구에서 6국의 수도였던 금릉 땅이 폐허가 되었다. 5·6구에서 삼산이수의 자연 풍광만은 여전하다. 7·8구에서 구름[간신]에 가리어 장안[임금]을 볼 수 없다 등으로 표현되었다. 현종의 총애를 받던 이백이 양귀비와 고역사의 훼방으로 축출되어 사방을 유랑할 때의 비애와 간신이 득실거리는 궁정을 풍자함으로써 유미주의적인 자탄(自歎)의 시를 창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아도,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가 「봉황대시」를 창작하는 동기 부여는 되었다 할지라도 창작 태도나 주제 의식은 조선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징]
김천의 봉황대가 태어남에는 중국의 금릉 봉황대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백은 봉황대를 자탄의 촉매로 극대화시켰는데 반하여, 이성순 부자는 봉황대를 목민관의 세심 공간으로 표출해 내었다. 「봉황대시」는 조선의 선비가 조선의 정서와 의지로 노래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무비판적인 사대(事大)나 모화(慕華)를 없게 하였다. 봉황대가 비록 관루대(官樓臺)이지만 「봉황대시」에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덕으로 여겼던 목민관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겼다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의의와 평가]
중국의 영향 하에서 태어난 봉황대의 존재 의의를 순수 조선의 명승지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바로 「봉황대시」이다. 목적이 있는 창작 태도나 주제 의식을 지녔다 하더라도 조선 선비는 조선의 정신으로 사물을 보고 그것을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김천의 「봉황대시」는 나름의 존재 의의와 가치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