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A02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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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기동 |
[1862년 4월의 동부리]
“어쩐다냐?”
개령현 동부리 쌍샘 인근 비석거리에 사는 김규진은 애꿎은 담뱃대만 뻑뻑 빨아대며 한숨을 쉰다.
벌써 여러 날 전부터 개령관아에서 지난해 빌렸던 보리쌀을 갚으라고 아전들이 닦달을 하더니, 급기야 어제는 가마솥을 떼어 갔고 오늘은 또 동헌에 불려 나가 볼기까지 얻어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재작년 환곡을 갚지 못한 동생은 식솔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아이고, 보리 수확할라카마 달포는 남았는데 우짜라는 기여. 도망친 동생놈, 죽은 아들놈 몫까지도 내더러 내놓으라카마, 뭐 죽어라는 소리지.”
작년에 천연두를 앓다 아들이 죽은 뒤로 절반은 넋이 나간 아내는 툇마루에 걸터앉은 채 감문산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에잇 빌어먹을, 이래 죽어나 저래 죽어나.”
연신 빨아 대던 빈 담뱃대를 집어던진 김규진은 집을 뛰쳐나갔다.
[폭풍 전야]
김천 최대의 곡창지를 자랑하는 개령들에도 보릿고개가 찾아들면 어김없이 온 현민의 한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랜 세도 정치의 폐습으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난 지 오래인데 관리들은 백성들만 닦달할 뿐이다. 1862년(철종 13) 2월,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이 삼남 지방으로 확산되더니 마침내 함안, 성주, 거창을 거쳐 개령 땅까지 밀려왔다. 경상도 서북부 최대 민란으로 기록된 ‘개령민란’의 중심에 선 이가 동부리 김규진이었다.
동부리에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은 인물로만 전해지는 김규진은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일찌감치 전해 듣고 동지들을 규합해 봉기를 독려했다. 1862년 4월 1일 늦은 밤, 동부리와 양천리를 연결하는 역마고개 아래 주막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 몇 사람이 모였다.
“우리가 왜 죽은 놈의 세금까지 내야 하냐는 말이지. 이대로는 못 사네. 우리 장날 모여 관아로 몰려가세.”
이로부터 김규진은 격문을 돌리고 벽서를 붙여 봉기를 촉구하는가 하면, 가담하지 않으려는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동참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날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시작도 하기 전에 주모자 김규진이 개령관아에 투옥되면서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김규진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관아에서는 현민들의 동요와 상부로부터의 문책이 두려워 이 같은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있었다.
[분노가 민란으로 터지다]
운명의 4월 7일, 개령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배시내 장터에는 아침부터 현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내 수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 속에서 이태복이란 젊은이가 주막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더니 김규진의 투옥과 고문, 원근 각지의 민란 사실을 소리 높여 알렸다.
관아의 수탈로 감정이 격해져 있던 현민들은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때 누군가 “관아로 가자.” 하고 소리쳤다. 불에 기름을 뿌린 듯 현민들은 일제히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보리가 막 피워 오르기 시작한 개령들을 가로질러 동부리 관아로 몰려갔다.
현민들은 먼저 옥전골로 달려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석방하는 한편, 관아로 달려가 우학능·우해용·문진기 등 원성이 자자했던 관리 다섯 명을 붙잡아 죽이고는 동헌에 불을 지른 다음 전세·환곡의 장부를 모두 소각했다.
또 박경주를 비롯해 그동안 관아에 아부하며 관리들과 한통속이 되어 부정 축재한 자들의 집 50여 호를 불살랐다. 현감 김후근은 읍민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도망가 목숨을 부지했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윤경태를 안무사로 급파하고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후임 현감에 이종상을 임명했다.
개령민란을 수습하면서 경상감사 이돈영은 우선 현감 김후근을 파면할 것을 건의했다.
『김천시사』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백성들의 삶이 어그러져서 공중에 매달린 지가 오래되었다. 고을의 원[長史]이 된 자가 진실로 삶을 편안히 하고 업[생업]에 즐거워할 수가 있도록 알맞게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한결같이 고을 원의 죄인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원망을 호소하고 폐단을 바로 잡음에 정도를 기필할 것이 없다고 하여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인가에 불을 질러 훼손하고 위협과 공갈로 재물을 약탈했다는 것은 진실로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만 철저하게 조사하여 후일을 위하여 한번 크게 징계삼을 뿐인 것이다.
[民生之倒懸久矣爲長史者苟能撫摩得宜安生樂業則安有是也一則長史之罪也然而訴寃矯瘼何患無其道而必也戕 人命燒毁人家威脅恐喝 攘奪貨者誠未之前聞也地不可不到底査 一番大徵創後己]”고 했다.
우의정 조두순은 개령민란에 대하여 왕에게 진언하기를, “개령현감 김후근을 파직에 그칠 일이 아니라 잡아다가 문초해야 하며, 난민만 벌주고 수령은 벌하지 않음은 온당치 못합니다.[亂民罪固當誅而守令者亦安免失先失其道之罪 前開寧縣監金厚根不可以罷黜而止請拿問嚴勘批日罪民而不罪守令可]”고 아뢰었고, 이 즉시 김후근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개령민란으로 인해 주모자 김규진 등은 참수형을 당하고 한동안 개령현은 조정의 눈총을 받기도 했으나, 부정한 권력에 대한 불꽃같은 저항 정신과 개혁에 대한 의지는 역사에 길이 기록되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