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A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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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기동 |
[민족의식의 요람 동부리]
개령면 동부리는 교통의 요지이자 개령들의 경제한 기반을 바탕으로 개항기부터 교회와 신식 학교가 건립되어 일찍부터 의식 있는 선각자와 민족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교육과 선교의 힘은 민족의식으로 승화되어 김천 지역 독립운동의 시발지가 되기도 했는데, 이는 동부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4차에 걸친 만세운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운명의 날이 밝아 오다]
1919년 3월 24일 동부리의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동부리에 자리한 개진학교[현 개령초등학교]의 졸업식 날이기도 하거니와 학교 인근에 사는 마을 유지 은창서의 집에서 혼례식이 있는 관계로 아침 댓바람부터 원근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날 졸업식과 잔치에 참석한 주민들은, 3월 11일 김천 시내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준비하다 김충한을 비롯한 주동자 여섯 명이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격론을 벌였다. 이때 동부리 출신으로 대구 계성학교를 다니며 동맹 휴학을 주동하다 퇴학을 당하여 고향에 머물러 있던 김단야[본명 김태연]는, 3월 8일에 있었던 대구에서의 독립 시위운동과 11일에 실패한 김천 시내에서의 시위 사건의 전말을 전하며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지금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저 무도한 일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거사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 먼 산 보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개령 지역 개신교 지도자로서 개령교회를 세우고 주민 계몽에 앞장섰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대구로 유학을 떠나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던 김단야의 주장에 많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옳소! 옳소!”
그리하여 오후 4시, 김단야와 허철, 전종수, 최영돈 등 신교육을 받은 동부리의 젊은 인재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 혼례식과 졸업식에 왔던 하객들과 학부형, 학생 수백 명이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마을 앞 유동산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인원이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그달 11일에 있었던 김천 시내 시위운동 미수 사건으로 비상이 걸려 개령보통학교 앞 동부리 헌병분소에 무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 기마대가 출동해 비석거리와 쌍샘, 옥전골, 동부연당을 행진하여 감천 변 유동산에 오르려는 시위대의 선두를 막아섰다.
시위대와 헌병대는 동부연당 앞 논바닥에서 팽팽한 대치 국면에 들어갔고, 시위대 수백 명을 몇 명의 기마대 헌병으로 제압하기가 버거웠던 일본 헌병들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그 사이 김천 시내에서 지원 출동한 헌병대가 마을을 포위하며 수색에 들어가 시위 주동자 네 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김단야, 허철, 전종수, 최돈영은 동부리 헌병분소에서 모진 구타를 당한 후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관학산에 울려 퍼진 독립 만세]
이날의 사건은 민족 독립에 대한 동부리 주민들의 열망에 불을 지폈고, 뒤이어 일어난 증산면 평촌리 만세운동, 김천교회 연합 시위, 봉산면 상금동 만세운동 등 김천 지역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3월 24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의 여파로 동부리에는 헌병이 보강되고 순찰이 부쩍 강화되어 마을 곳곳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게 감돌았다. 그러나 이미 주민들의 마음속에 스며든 저항감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잠재우지 못하여, 4월 3일 밤 마을 주민 문정환이 주민 두 명과 함께 관학산에 올라가 또다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추격하는 헌병들의 눈을 피해 인근 마을에 은신했던 문정환은 다음날인 4일 홍순린·문학이[일명 문병구, 당시 19세]와 함께 관학산에 올라가 다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 의해 문학이는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문학이는 이 일로 태형 90대에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문학이는 1993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어 지난날의 공적을 인정받았다.
문학이의 장남 문소환[1931년생] 씨는 “부친은 옥고를 치르면서 얻은 지병으로 평생 고통 속에 사셨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셨어.”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동부리에서의 네 번째 만세운동은 4월 6일에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횃불들이 관학산을 향해 내달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양천허씨와 단양우씨 등 동부리 부잣집에서 땅을 소작하거나 머슴을 살던 주민들이 주동하여 일어났다.
이들은 출동한 헌병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개령 헌병분소에서 모진 매질을 당했으며, 김임천·도동영·김명길·최하만·정남준·황도석·이말용·김타관 등 아홉 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90대의 태형을 받았다. 이들 중 김타관은 1993년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어 지난날 독립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 늦게나마 평가를 받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