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A0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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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송기동 |
[동부리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김단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화요 3인조’, ‘상해 트로이카’,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단야(金丹冶). 김단야는 분단국가라는 현실상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랫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7년 8월 16일 복권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인물이다.
서른일곱 살 꽃다운 청춘을 살다간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단야의 고향이 개령면 동부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김단야는 1900년 1월, 개령면 동부리 68번지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단야의 아버지 김종원은 초기 개신교도인 선친의 영향을 받아 동생 김종수와 함께 동부리 12번지 관학산 자락에 개령교회를 건립한 인물이다.
김종원이 아들 김단야를 기독교 계열인 대구 계성학교로 유학 보낸 것도 이러한 집안의 깊은 신앙심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김단야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17세 되던 해인 1916년 11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하다고 주장한 교장을 몰아내자며 동맹 휴학을 주동하다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김단야는 일본 동경의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6개월간 공부하다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초 김단야는 학생 비밀 결사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걸려 수배를 받게 되자 고향 동부리로 낙향했다.
고향에 머물러 있던 김단야는 3월 24일, 마을 잔칫날을 틈타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태형 90대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인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상해로 망명한 후 박헌영·임원근 등을 만나 속칭 상해트로이카로 불리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출소 후 김단야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로 근무하며 청년단체를 조직하는 등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안타까운 죽음과 가족들]
1937년 11월 김단야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비밀경찰에 체포되었고, 다음 해인 1938년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본 경찰의 밀정’이란 죄목이었다. 짧은 평생을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일제에 항거했건만 결국 죽음의 이유가 그토록 미워했던 일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이었으니,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마을 주민 홍순채[1926년생] 씨에 따르면, 동부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김단야의 집안은 토지를 어느 정도 소유한 중농 규모의 생활 수준이었으며,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교회를 다닐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중인데 한 인민군 장교가 우리 집에 쑥 들어와. 가만히 보니까 김섭인기라. 어찌나 반갑던지.”
김단야의 외아들 김섭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마을 주민 강상철[1927년생] 씨는, 해방 후 필체가 좋아 개령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겠다며 월북한 친구 김섭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처음부터 월북할라고 했던 건 아니었는 모양인데, 서울에 여운형 씨를 찾아가서 아버지 행방을 물으니 이북의 박헌영이를 찾아가 보라 했다는 기라. 전쟁이 난다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버지 만날 생각만 가지고 38선을 넘어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카고. 낙심하던 차 전쟁이 나니까 유명한 김단야 아들이라고 인민군 장교를 시켜 줬던 모양이라고.”
김단야의 아들 김섭은 종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숨어 지내다 체포되어 수형 생활을 했고, 출소 후 동부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우돈규의 선거 사무장으로 일하다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돌아오지 않는 아들 소식을 듣기 위해 상경한 아버지 김종원은 한 신문사를 찾았다. 당시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심경이 실린 1946년 5월 2일자 『조선인민보』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그 애를 만난 지는 서울에서 열린 첫 박람회 때인데 그때 만난 것이 5년 만이었소. 동부동에 있는 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처가인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만났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그저 내 아들의 모습이 깊이 보고만 싶었지요. 헌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꼴이 독일군같이 보이는데도 어쩐지 자갈 위에 핀 해당화 같고 고난의 암해에서 혈투하는 용사같이는 믿어지지 않았소. 그러나 일제의 총칼이 눈앞에 번득여서 몸서리가 나니 너는 국경을 넘을 것이냐 머무를 것이냐 하고 물으니 국경을 넘겠다고 합디다. 눈물도, 말도 없는 이 상봉의 끝이 16년 전인데 그동안 그 어머니는 작년 겨울에 죽었고 해방은 되었으나 아들을 못 만나는 그 어미의 설움이 나에게 전염되었는지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을 와 보니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고 뒤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소. 단야의 친구들을 두루 만나보고 안심을 했소.”
당시 김종원을 인터뷰했던 기자는 “여기까지 말한 70 노인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아들을 찾기 위해 김천에서 서울까지 찾아왔던 아버지의 희망과 달리 김단야는 1938년 이미 처형된 후였으니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시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 독립이었던 시대,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록 우리 체제와 달랐으나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김단야의 꿈인 조국의 독립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더 흐른 2007년, 늦게나마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