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C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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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여수경 |
[「삼도봉美스토리」 속 삼도봉]
2009년 2월 10일 서울의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는 「삼도봉美스토리」란 연극이 개막하였다.
삼도봉이란 지명을 조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면 연극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추측할 수 있지만, 지명이 생소하다면 이 연극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진다.
잠시 「삼도봉美스토리」의 시놉시스를 살펴보자.
“전라, 충청, 경상도가 만나는 삼도봉. 그곳에 세워진 미국 수입쌀을 보관하는 양곡 창고에서 평화로운 농촌 인심을 흔드는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용의자로 지목된 세 지방의 농부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고전분투가 시작된다.”
3도민을 대표하는 농민들이 걸쭉한 지역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극의 재미를 더하는 「삼도봉美스토리」는, 2009년 한미 FTA에 대한 반대와 한국 농촌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담고 있는 풍자 연극으로, 당시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선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다.
「삼도봉美스토리」의 속 깊은 이야기를 잠시 떠나 삼도봉이란 지명에 다시 주목하면, 문득 작가가 어떻게 삼도봉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이른다.
과연 연극을 본 많은 사람은 삼도봉이란 지역이 실존하고 있음을 알까?
3도가 모인 봉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행정적 구역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서로 왕래하면서 지금도 삶을 이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얼핏 지명이 같다는 배경 이외에 연결성이 없어 보이는 이 연극이 자꾸 뇌리에 머무는 것은, 해인리라는 지리적 배경과 해인리 사람들의 활동이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해인리 사람들은 행정 구역과 상관없이, 지역감정과는 더욱더 상관없이 오랫동안 전라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생활했다. 부항령 고갯길을 넘어 무풍장으로, 삼막골 고갯길을 걸어서 임산장을 오가며 생업을 위한 경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부항령과 삼막골을 넘어 무풍장과 임산장으로]
부항령은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옛길로, 작게는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오가는 지름길이다. 일제 강점기 부항령 남쪽의 덕산재에 도로가 나기 전 김천과 무풍의 주민들 대부분은 부항령을 넘어 무풍장을 이용했다고 숙굴댁[1925년생]으로 불리는 할머니가 말해 준다.
“감자, 서숙, 쌀, 보리를 지으면 무풍에 가요. 그때만 해도 차가 없지. 걸어서 무풍에 가는데, 부항령 넘으면 무풍장이에요. 무풍장 바로 재 넘어가면 무주 무풍이라고 무풍장. 다음으로 지례장 보고 그 다음에 김천장 보는 기라. 4일이 무풍장, 5일이 김천장인데, 지금 삼도봉터널 뚫어 놓은데 그 위로 다니면 김천 지례장 가는 거리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 다 무풍장을 갔어.”
지금은 삼도봉터널이 뚫려 있는 부항령을 통해 자동차로 오가지만, 과거에는 모두 걸어서 이 고갯길을 넘었다. 경지가 부족한 해인리 사람들은 봄이면 머리에 보리를 이고, 여름이면 감자를 이고, 가을이면 호두를 이고 무풍장을 향했다고 숙굴댁은 말한다.
“지금 터널 뚫어 놨잖아. 삼도봉터널이라고 뚫어 놓는데, 그 울[위]로 넘는데 무풍장 걸어갔다 오나 지례장 갔다 오나 똑같아 거리가. 가깝기로 따지면 무풍이 더 가깝지.”
해인리 사람들이 이용했다는 무풍장은 김천의 부항면 사람들을 비롯해 경상남도 거창과 전라북도 무주, 충청북도 영동의 4개 지역 사람들이 어우러진 이 일대 최대의 5일장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00m가 넘는 곳에 자리한 무풍장이 인근에서 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산준령 자락에서 생산된 부산물, 특히 호두와 담배, 산채와 각종 약재 및 고랭지 채소 등이 많이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김천 지역을 비롯해 무주와 영동 등 4개 도민의 잔칫날과도 같았던 무풍장에는 무주읍장에는 없는 생선은 물론이고, 진주에서 거창을 거쳐 온 싱싱한 해산물이 무주에는 안 가도 무풍에는 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무풍장을 이용하기 힘든 해인리 사람들은 삼막골을 넘어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에서 1일과 6일에 열리는 임산장을 이용했다고 정인규[1938년생] 씨가 말해 준다.
“골짜기 여[여기] 있을 때는 삼막골 넘어가면 임산리 임산장에 거 가보기도 한다. 황간 바로 거 밑에 있어. 옛날부터 전부 걸어서 갔어.”
무풍장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임산장에는 소백산맥 산간 지역에서 생산되는 감자와 고구마, 호두 등이 거래되었기에, 해인리 사람들은 무풍장을 대신해 임산장도 많이 이용했다고 전한다.
[경쟁적인 돌 쌓기 전설]
세 개의 도가 모여 있던 이곳에서는 항시 좋은 이야기만 전해졌던 것은 아니다.
“삼도봉헬기장에 가면 정상에 돌무더기 세 개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면 그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져다 놓고,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에, 충청도에 가면 충청도에 가져도 놓았어.
자꾸 자기네들 마을에 가져다 놓은께, 나중에는 돌무더기가 세 개가 되었는데, 각자 크게 쌓으려고 해서 계속 올렸다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싸움도 많이 하고, 몰래 가서 옮긴다고 보초를 서기도 했어. 지금은 없어지고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어.”
서수생[1936년생] 씨의 말처럼 삼도봉의 돌무덤은 그것이 위치한 도가 잘살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늘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3도가 만나는 삼도봉에서는 한 발자국만 옮겨도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이 쉬웠다. 이 때문에 이곳에 돌무덤을 쌓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도에 돌무덤이 많이 걸칠 수 있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3도의 사람들이 깊은 밤 몰래 삼도봉을 올라 돌무덤을 옮겨 놓기를 거듭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된 행동은 결국 분쟁으로 이어져, 돌무덤이 세 개나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했는데, 돌무덤이 세 개가 되었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은 다른 도의 돌무덤보다 더 높게 쌓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옛날에 있었다는 삼도봉의 돌무덤을 직접 본 해인리 사람은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를 전혀 허구로 생각지는 않고 있다. 지리적으로 한 곳에 위치하지만 3도 사람들의 기질은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경쟁적 돌쌓기는 분쟁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3도의 사람들은 돌쌓기와 돌무덤을 이동하면서 서로 부딪히며 만났을 것이고, 이것도 하나의 관계가 되어서 상호 교류의 물꼬로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