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C010203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재민

[백두대간 산골 오지 마을]

부항면 서쪽 끝 약 500m 높이에 자리한 해인리 해인동의 사면은 산이다. 이쪽을 봐도 계곡, 저쪽을 봐도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 평지는 제한된 공간에만 위치한다. 삼도봉을 등지고 부항면 방향 계곡을 따라서 좌우로 펼쳐져 있는 대지가 해인동 사람들이 유일하게 경작할 수 있는 농지다.

인구가 늘어나서 마을을 확장하기 위한 방법은 삼도봉을 향하거나 또는 부항면 방향 계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부항면 방면 계곡 아래는 이미 다른 마을[윗두대]이 자리 잡고 있다. 땅을 찾기 위한 방법은 삼도봉을 향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 마을 옛날에 산 중간 중간에서 움막 같은 집 짓고 살던 사람들도 있었어. 그런 사람들은 화전해서 먹고 살았지.”

김용원[1947년생] 씨의 말처럼 해인동 사람들 중 일부는 먹고살기 위해 화전(火田)을 선택했다. 가족의 땀으로 비탈지고 척박한 땅에 불을 지르고 개간하여 조·피·메밀·기장·옥수수·콩 등을 키워 생활을 유지했다.

[화전과 함께 참나무 숯을 굽고]

화전은 삼막골과 안골, 싸리박골 등 해인동 골짜기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먹고살기 위해 화전으로 최소한의 땅을 일군 사람들은 콩·팥·감자·옥수수 등을 심어서 연명을 했기에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없었고, 결국 화전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해인동 사람들은 화전과 더불어 참나무 숯을 구웠다. 산골 오지 마을이라 세상사는 일과 상관없이 돌아갈 듯도 하지만 백두대간의 좋은 참나무는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정인규[1938년생] 씨는 말했다.

“해방되기 직전에는 전부 산에 참나무가 좋아서 숯을 구운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래서 그 일을 좀 하고 배급을 받아먹었어. 근데, 해방 탁 된게[딱 되니깐] 배급이 끊기니까, 먹는 기 딱 끊긴 기야. 그래가 옥수수하고 다시 숨겨 가 농사지었지.”

일제 강점기 백두대간의 참나무는 일본인 장사꾼들의 숯으로 변모했다. 참나무를 숯으로 만드는 작업에 당시 화전을 일구던 해인동 사람들의 노동력이 이용되었다. 하루 종일 숯을 굽는 노동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간 대신 배급을 받음으로써 생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참나무 숯을 파는 일본인이 사라지자 숯 굽는 일도 중단되고, 배급도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삼막골 화전민들은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배급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생활에서 다시 화전을 일구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파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화전을 통해 생산된 감자와 옥수수는 가족들의 1년치 식량으로 먹고, 콩과 팥은 김천장의 상인들에게 팔아 돈으로 바꿨다. 김천장의 상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해인동으로 들어와 삼막골의 콩과 팥을 구입해서 갔다.

“그때 박 대통령이 없는 사람들은 무조건 파먹을 건 다 파먹으라 캤다고[말씀했다고]. 그래서 우리 마실[마을]에 사람들도 있고, 부항면 저 밑에 사람들도 올라왔다 칸께[했어]. 나무를 전부 다 베어 가지고 불 놔서, 콩·팥·감자, 이래 전부 해먹었잖아[농사지었어].”

해방 이후도 그렇거니와 6·25 전쟁으로 인해 해인동 사람들의 생활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생활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고, 그 중에 화전은 그나마 최선의 수단이었다.

[화전 정리법이 시행되다]

1966년 해인동 삼막골과 안골 등 골짜기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파먹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이 공표되면서,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터를 잡은 곳에서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1966년 공표된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은 황폐화되는 국토 산림의 보존과 화전민의 생활 향상 도모, 북한 간첩들의 은신처 색출을 통해 우리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리하여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의 화전민들은 그 동안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마을로 내려오거나 화전민들의 집단 이주지로 옮겨 가야 했다. 해인동의 화전민들에게도 이 법은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1966년 당시 해인동의 화전민에게는 삶의 터전이 아닌 가구당 4만 원의 이주 비용이 지급되었다.

당시 국가 공무원 봉급이 2000원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보상금이었다.

그리하여 삼막골을 비롯하여 해인동 산골에 흩어져 생활하던 화전민들은 국가의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보상금 4만 원을 받고 이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화전민들 중 일부는 보상금으로 지금 해인동에 집을 짓고 땅을 사서 터를 잡은 사람도 있는 반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간 사람도 많았다고 전한다.

[정보제공]

  • •  정창기(남, 1934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 •  정인규(남, 1938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 •  김용원(남, 1947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해인산장 운영)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