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C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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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여수경 |
[마을회관 앞 정자의 터줏대감들]
해인리는 삼도봉을 비롯한 백두대간이 만들어 낸 계곡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비탈진 계곡을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지었지만, 마을의 중간에 이를 때쯤 뜻하지 않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광장의 좌측에는 새로 지은 듯한 양옥집과 마당 앞 조그만 정자가 눈에 띈다.
마을회관 앞 정자는 해인리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한다.
정자 옆으로 삼도봉의 시원한 계곡이 지나가며, 아래로는 오미자를 비롯한 해인리의 밭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는 주차장과 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보여 지나는 모든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명당에 모인 사람들은 정자의 터줏대감이며 마을의 터줏대감인 할머니들이다. 그리하여 햇볕이 잘 드는 날이라면 정자를 지키며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다.
무심하게 정자를 지나갈 것 같지만, 처음 마을에 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발길을 돌리게 된다.
[할머니들의 다양한 해인리 이야기]
정자에서 잠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출근을 하듯 매일 나온다는 분과 집안일이 바빠 때때로 들른다는 분도 있다. 집 앞 텃밭을 가꾸느라 매일 나오기 어렵다는 분도 있지만 정자는 마을 할머니들의 모임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할머니들에게 “고향이 여기세요?” 하고 물어 봤더니, ‘나는 어디고, 저 사람은 어디야’ 하는 등, 하나의 질문에 여러 분이 한꺼번에 대답을 한다. 해인리가 고향인 분도 있지만 김천 또는 충청도가 고향인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19~20세에 시집을 와서, 해인리에서 50평생을 살며 해인리의 사람이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내가 다섯 살 때 이 마실[마을]에 들어왔지. 나는 저 전라북도 무주 어디 있다가 이 마실에 들어왔지. 그때 뭐 우리 부모님하고 오빠하고 살아 볼라고 이 마실에 들어온 거 같애.”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삶의 대부분을 해인리에서 보낸 할머니들은 서로에게 가족과도 같았다.
[고달픈 생활은 추억담이 되고]
정자에서 풀어 낸 이야기는 모두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해인리에서 할머니들은 먹고살기 위해 생활력 강한 어머니 또는 부녀자로 살아야 했다. 낮에는 나물을 뜯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고, 누에를 먹이고, 담배를 말리느라 잠시도 등허리를 펴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봄 되면 전부 나물 뜯지. 저기 울로[위로, 골짜기로] 가면 나물이 많아. 고사리, 취똥[취나물] 그런 거 다 뽑아서 죽 끓이가 묵고 그랬지.”
“그래가 우리 저 마이[삼도봉 중턱] 걸어 올라가가 나물 뽑고 내려오면, 영감들이 받아 주면 얼마나 좋갔어? 내가 그 아픈 다리 이끌고 다 왔다니깐. 보리밥을 요만한 거[한 주먹을 가리킴] 싸 가지고 앉아서 나물 뜯어 놓고 오는기라. 차마 힘들었지.”
하루도 빼지 않고 가파른 삼도봉 정상 문턱을 오갔다는 이야기에 그 삶의 고달픔이 절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또한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 할머니들의 소소한 입담거리가 되고 있었다. 고달픈 해인리 산골 생활과 집안일에는 관심 없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 매서운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이제 웃으면서 정자에서 풀어내는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그렇게 할머니들은 옛일을 추억하며 해인리의 정자를 지키고 있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