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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는 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726
한자 -碑
영어의미역 The Blooding Monument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연정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윤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석전설|신이담
주요 등장인물 대제복구비|집주인
관련지명 전라북도 김제시 연정동 후신마을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대제복구비의 저주|핏빛과 같은 녹물이 흘러나오는 우물|원인 모를 교통사고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연정동에서 대제복구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피 흘리는 비」는 김제에서 죽산 방향으로 2㎞ 지점의 연정동 후신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대제복구비가 피를 흘린다는 비석전설이다. 대제복구비는 1848년(헌종 14) 7월에 세운 것으로 김제군 내에서 가장 컸다는 대제저수지를 복구한 사람들에 대한 공적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대제를 복구할 당시의 총위사, 전라도관찰사, 어사 그리고 김제군수 등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건립했다는 연유가 새겨져 있다.

[채록/수집상황]

김제 지역의 향토학자 정진형이 채록한 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http://www.gojb.net]의 전통문화 항목과 1995년 김제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김제시사』에 실려 있다.

[내용]

1848년(헌종 14) 7월 대제를 복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공을 세운 사람들 중에는 당시 총위사, 전라도관찰사, 어사 그리고 김제군수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대제복구비가 서 있던 뒤쪽에는 허름한 초가 한 채가 있었는데, 어느 해 이 초가집의 주인이 집을 고치게 되었다. 그때 자기 땅에 서 있던 대제복구비를 울안에 넣고 담을 둘러쳤다. 그런데 담을 치며 마지막 벽돌을 올려놓는 순간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더니 대제복구비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우물에서도 핏빛과 같은 녹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로 퍼졌으며, 사람들은 대제복구비 근처에 가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는데, 대제복구비가 서 있는 앞 도로에서 원인 모를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집주인은 대제복구비가 저주를 내린 것이라 생각하고 도로 담을 헐었다. 그 후로는 비에서 흐르던 피도 멎게 되었고, 우물에서 나오던 녹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도 가끔 피를 흘릴 때가 있는데, 비에서 피가 흐르면 으레 비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왜 이 비석이 피를 흘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사연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피 흘리는 비」의 주요 모티프는 ‘대제복구비의 저주’, ‘핏빛과 같은 녹물이 흘러나오는 우물’, ‘원인 모를 교통사고’ 등이다. 인근의 촌부 한 사람이 대제복구비를 울안에 넣고 담을 둘러쳤는데, 그때부터 대제복구비가 피를 흘리면 우물에 핏빛과 같은 녹물이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원인 모를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등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하는 신이담이다.

「피 흘리는 비」「벽골제 비명의 보존」에 나타난 저주의 내용과 비슷하다. 벽골제비는 원래 마석(磨石)으로 만들어졌는데, 초동들이 수시로 이 비석에 낫을 갈았다. 그러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 노인이 여기에 낫을 갈다가 다치면 잘 낫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초동이 계속 낫을 갈다가 다쳤는데 오랜 동안 상처가 낫지 않으므로 이후로 사람들이 벽골제비에 낫을 갈지 않았다고 한다. 「피 흘리는 비」에서 보는 것처럼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는 사람에게 경종을 울려 주려고 비가 피를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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