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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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始壽 |
영어음역 | O Sisu |
영어의미역 | O Sisu |
이칭/별칭 | 덕이(德而),수촌(水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오정원(吳挺垣)이다.
[활동사항]
1656년(효종 7)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한 뒤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문학·사헌부지평·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사복시정(司僕寺正)·평안도암행어사를 지냈으며, 사헌부집의·응교·의정부사인을 거쳐 166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예빈시정·승정원승지를 거쳐 1670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기근에 허덕이는 전라도 지방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예조참의·이조참의·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74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한 뒤 형조판서에 발탁된 데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고, 청나라 조제사(吊祭使)들이 돌아갈 때 반송사(伴送使)가 되었다.
1676년(숙종 2) 호조판서로 발탁되어 농사의 흉황을 역설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사헌부대사헌·판의금부사·이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1679년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에 연루되어 남인들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앞서 청나라 조제사가 왔을 때 왕에게 왕약신강설(王弱臣强說) 등 허위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수촌집(水邨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마을 뒤 구릉에 있다. 묘소 앞에는 너비 66㎝·높이 140㎝·두께 39.5㎝의 묘비와 동자상, 망주석, 장군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묘소 앞에는 오백령(吳百齡)의 사우(祠宇)가 있다.
묘역에는 오시수 신도비 2기가 있다. 오른쪽 비는 1694년에 세워진 것으로 너비 124㎝·높이 243㎝·두께 54㎝의 규모로, 우의정 민암(閔黯)이 비문을 짓고 전주부윤 박경후(朴慶後)가 본문 글씨를 썼으며 대사간 이서우(李瑞雨)가 전서 글씨를 썼다. 왼쪽의 비는 1810년(순조 10)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너비 55㎝·149㎝·두께 39.5㎝의 규모로, 장령 정종로(鄭宗魯)가 비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복관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삭직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신원 요청으로 다시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