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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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悌元 |
영어음역 | Seong Jewon |
영어의미역 | Seong Jewon |
이칭/별칭 | 자경(子敬),동주(東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학자.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이다. 시조는 고려 때 중윤(中允)을 지낸 성인보(成仁輔)이다. 6대조는 이헌(怡軒) 성여완(成汝完)으로,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다가 조선 태조가 등극하자 포천의 왕방산에 은거하면서 삭망 때면 송악을 바라보고 통곡하면서 스스로 왕방거사라 칭하며 고려를 잊지 않는 의리를 보여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5대조는 회곡(檜谷) 성석용(成石瑢)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과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수헌(睡軒) 성개(成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으로, 단종(端宗) 때 승문원교리를 지냈으며, 종질인 성삼문(成三問)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자 이에 연좌되어 국문을 당한 여독으로 사망하여 요당(蓼堂)과 물계서원, 동학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할아버지는 성담년(成聃年)으로, 큰할아버지인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고향인 파주에 장사 지내고 묘소 아래에서 살았다. 끝내 세상과 단절하고 칩거하며 평생을 보내어 생육신으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성몽선(成夢宣)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겼으며 시와 글씨가 호방 강직하였다. 장흥부사를 지냈으나 성제원이 2세 되는 해에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부사를 지낸 조서종(趙瑞鍾)의 딸이다.
세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큰형의 셋째 아들 성문덕(成聞德)을 양자로 들였다. 조선 말기 학덕과 절의로 당대 선비의 모범이 되었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이 11대손이다.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뛰어난 바가 있었고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 해(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현인이 화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덮으며 “당고의 화가 현세에도 일어났구나”라고 탄식하며 은둔의 뜻을 가졌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은 서봉(西峯) 유우(柳藕)에게 수학하였다. 처남인 송귀수, 송인수와 더불어 삼현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26세에 외숙을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했다.
1549년(명종 4)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몇 개월 동안이나 곁을 지키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가례에 따라 모친상을 치러 효성으로 고을에 칭찬이 높았다. 1551년 탈상한 후 전답과 집을 과부가 된 누이에게 주고는 공주의 선영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달전 언덕 뒤의 옥정봉 위에 축대를 쌓고 항상 모친의 묘를 바라보면서 울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축대를 망묘대(望墓臺)라고 하였다.
1553년 유일(遺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방에 있는 유능한 인재)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천거되었다가 그 해에 보은현감이 되었다. 보은 고을에 도착하여 세속의 형편에 따라 다스리고 정사를 베풂에 공정하고 엄격하였고, 자기 자신에게는 대단히 박하였으나 백성을 어루만짐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고 윗사람을 섬김에 어긋남이 없어서 떠도는 유랑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한번은 성제원이 관직을 던져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울면서 길을 막고 둘러싸고는 다시 고을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본래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성제원이 스스로 높은 체하여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여길까 염려하여 현감이 되었다가 임기가 다하자 그만두고 달전으로 돌아와 54세에 죽었다.
제자로는 선조(宣祖) 때 형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낸 성수익(成壽益), 송응상(宋應祥)·송응서(宋應瑞) 형제, 선조의 장인인 박응순(朴應順)과 이응기(李應麒) 등이 문인록에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사상]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지리학·의학·복술 등을 배웠으나 벼슬길에 오르기를 싫어하였다. 스승 유우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진들을 가르치는 데 힘써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글씨·그림·천문·음률·복서·의술에 능하였고, 특히 『주역』에 통달하여 문명이 높았다고 한다.
성제원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유우에게서 수학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김종직(金宗直)·김굉필을 잇는 한국의 정통 도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은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 지치(至治)의 기치를 드높였던 명현들에게 전수되었으며, 또한 서봉 유우를 통해 성제원의 학문과 사상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권14 8년 5월 신해조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성제원에 대한 인물평을 통해 사상과 학문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사람됨이 세상 밖에 방랑하여 인간 세상을 하찮게 보는 뜻이 있었다. 스스로 술과 시에 취하고 노래하는 것을 흥취로 삼았고, 가슴속은 광달(曠達)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나아가 보은현감이 되었을 때 정치에는 청렴 간결한 것을 숭상하고 교화를 급선무로 삼았으므로 치평(治平)이 제일이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동주일고(東洲逸稿)』가 전한다. 3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03년 송병선(宋秉璿)과 송병준(宋秉俊)이 각각 쓴 서문과 발문, 1906년에 성기운이 쓴 발문이 있다. 1~2권은 시·기·묘문·제문·묘갈명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권은 연보·행장·망묘대비지(望墓臺碑誌)·제가기술(諸家記述)·투증시편(投贈詩篇)·사우록·문인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제가기술은 『국조기요(國朝記要)』, 『명신록(名臣錄)』, 『야사(野史)』, 『태곡집(太谷集)』, 『택당집(澤堂集)』, 『중봉집(重峯集)』,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에 흩어져 있는 성제원 관련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공주의 충현서원, 보은의 상현서원과 금화서원, 창녕의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