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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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玉均 |
영어음역 | Gim Okgyun |
영어의미역 | Gim Okgyun |
이칭/별칭 | 백온(伯溫),고균(古筠),고우(古愚),충달(忠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성격 | 문신|개화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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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
성별 | 남 |
생년 | 1851년 |
몰년 | 1894년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관직 | 호조참판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신이자 개화 운동가.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이고,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이다.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6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었다.
[활동사항]
6세 때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박규수(朴珪壽) 등에 의하여 개화사상이 형성되자, 1870년 전후부터 다른 청년들과 함께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웠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김옥균은 세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가 일본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견문하면서 곧 나라에 위기가 닥쳐오리라 판단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김옥균이 개화 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나라와 명성황후를 따르는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자신의 개화사상과 주장을 실천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고종 21, 음력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단행하여 그날 밤으로 명성황후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김옥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12월 5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밤을 새워 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 아래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傳敎) 형식을 빌려 이를 공포하였으며, 오후 3시에는 국왕도 이를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무력 개입으로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저항하다가 패퇴하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은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도망하여 철수해 버렸다. 이에 개화당은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여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0년간 일본 곳곳을 방랑하다가 1894년(고종 31)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수구파 정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학문과 사상]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 부강한 근대 국가가 되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 신분 제도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 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 재정의 개혁, 공장 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선진 과학 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 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목축의 발전, 광업·임업·어업·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라의 자주 근대화를 위해서 널리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 제도와 형사 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을 주장하였다.
[저술 및 작품]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10년(순종 4)에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1989년 2월 22일 공주군(현 공주시) 주관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있는 2,473㎡의 생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