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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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灘川面同族村 |
영어의미역 | Tancheon-Myeon Single-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에 있는 집성촌.
[형성 및 변천]
함양박씨가 소라실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재 주민의 15대조 때로, 약 4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함양박씨의 입향조인 박문필은 원래 전라도 김제에서 살았는데, 박문필의 아내 평창이씨는 남편이 죽자 아들 3형제와 딸 한 명을 데리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원래 소라실에는 평창이씨가 먼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함양이씨의 입향조인 박문필의 장인인 평창이씨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그러나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평창이씨들은 함양이씨가 번창하면서 지금의 강원도 평창으로 이거하였다.
이처럼 소라실은 함양박씨들을 중심으로 번창한 마을이다. 함양박씨들은 마을 전방의 중 들을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며,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00여 호 가까이 되는 가옥들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소라실은 부유한 양반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입향 이후 이름을 떨친 사람은 없으나 계속 소라실에 머물며 ‘토반’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함양박씨의 세력권 안에서 성장하던 송학리의 바로 옆 마을은 유하리인데, 아마도 송학리의 함양박씨들이 소라실에서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다 옆 마을인 유하리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소라실과 유하리 버들골 함양박씨들은 같은 계파의 함양박씨로 아주 친밀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소라실 근처 유하리 강변에는 인조 연간에 박씨 가문에서 설립한 원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송학리 1구에 5효자 묘소가 있으며, 유하리 버들골에 5효자 생가가 남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송학리와 유하리는 송학리 함양박씨들이 번창하면서 옆 마을이었던 유하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탄천면에서는 다른 동족마을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1리에는 영광김씨와 광주정씨가 주축을 이루면 살고 있는데, 원래 대학1리에 가장 먼저 살았던 성씨는 은진송씨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떠나고 없어 자세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이렇게 대학1리에 광주정씨와 영광김씨가 있다면, 대학2리와 옆 마을인 견동리에는 나주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원래 나주김씨는 전라도 무안에 살던 성씨들로 그들이 대학2리로 입향한 것은 정유재란과 관련이 있다. 나주김씨 입향조인 김천성은 정유재란 당시 피난을 왔다가 지금의 경동리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부친 김충수와 모친 금성나씨가 순절한 뒤 삼형제는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가다 공주까지 왔는데, 왜구가 직산 전투에서 패하자 풀려나게 되었고 그 후 둘째였던 김천성이 공주 견동리에 터를 잡고 번성했다.
그 후 견동리 일대에 살던 나주김씨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번창하면서 바로 경계에 있었던 대학2리에까지 터를 잡게 되었고, 그것이 대학2리에 나주김씨 집성촌이 생기게 된 계기라고 한다. 대학2리에는 입향조인 김천성의 묘와 재실이 있으며, 김천성의 모친 금성나씨의 정려비각이 서 있다.
이 정려비각은 원래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의 김충수 처 금성나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것이 대학2리에 있는 이유는 금성나씨의 후손들인 나주김씨가 1983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2리에는 반남박씨들도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았는데, 조선 후기 문신 박필몽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가 집안이 거의 전멸하가시피 하자 박필몽의 아들인 박사침이 대학2리로 도망 오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필몽은 소론 강경파의 핵심 인물로 신임사화 때 노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고 하자 반란군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박사침과 박필몽은 잡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아들이었던 박사침이 도망을 쳐 지금의 대학2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현재 마을에는 1996년에 세워진 박남박씨 재실이 남아 있으며, 박형서의 부인이었던 나주김씨의 효절비가 남아 있다.
또한 탄천면의 국동리는 영일정씨의 세거지로 공주목사를 지냈던 정무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국동리에는 정무의 묘소와 부인의 묘소가 잘 남아 있는데, 왜 정무가 국동리에 유서(由緖)를 마련하게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정무가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이 묘를 국동리에 쓰고 세거하면서 영일정씨의 세력을 키워나갔다고 전해진다.
[현황]
탄천면에서 가장 유명한 성씨는 송학리의 함양박씨로, 아직도 양반의 기풍이 남아 있는 마을이며 공주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반 동족마을이다. 송학리에는 토옥골의 총 13호를 포함하여 46호의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중 함양박씨가 40호 정도를 차지할 정도이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유하리를 비롯한 송학리 1구에는 함양박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으며, 소라실 함양박씨 중에는 외지에 살다가 소라실이 함양박씨의 동족마을이라는 이유로 이곳에 자리 잡은 경우도 있을 만큼 함양박씨의 세력은 아직도 굳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