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A0101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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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빈 |
충현서원 의 창설당시에는 주자를 주향으로 석탄 이존오·한재 이목·동주 성제원을 배향하였다. 1628년에는 고청 서기를 별사에 제향하였으며, 효종조 중봉 조헌을 시작으로 사계 김장생,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 4인을 추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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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 사당에 모신 주자 영정
처음부터 배향된 배향인물 3인의 행적과 배향동기는 다음과 같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341-1371]는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순경,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서기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으며 공민왕 15년(1366)에는 우정언이 되어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공주의 석탄에 은거한 채 울분속에서 지내다가 31세로 죽었다. 석탄은 지금의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인데 고려말에는 공주목 관내였다.
한재(寒齋) 이목(李穆)[1471-1498]은 성종 말·연산군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완산이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일찍이 사림거두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태학생으로 있던 성종 21년(당시 20세)에 대비가 음사를 설치하고 무당을 불러들이자 앞장서서 논척하여 이를 물리쳤다. 또한 나라에 기근이 들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윤필상의 전횡때문이라고 격렬히 탄핵하다가, 이로 인해 공주의 씨학섬(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 유배되기도 했다. 공주의 부전동(지금의 우성면 내산리)은 당시 이목의 처향(妻鄕)으로, 이후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목은 무오사화때 28세의 나이로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목이 충현서원에 배향된 것은 충의로 공주에 유배당했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1504-1559]은 조선 명종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이다. 공주 출신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였으며, 의학·지리학·복술 등에도 두루 능했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을 지냈으며, 퇴직 후에는 다시 공주의 옛집으로 돌아와 향리에 은거했다.
이와 같이 향현 3인의 배향은 공주가 만년의 은둔처이거나 유배지 또는 가향(家鄕)이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추가 제향된 5인 곧,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고청 서기 등의 추배과정과 추배 동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조헌의 추배는 죽은 지 60여년이 지난 효종조에 이루어진다. 원래 공주 유생들이 추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에 서기도 함께 거론되었으나, 서기의 추배는 이루어지지 않고 조헌만 추배되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1586년에 공주목제독으로 재직했으며, 공암정사(후의 충현서원)의 산장(원장)인 서기를 천거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조헌의 충현서원 추배는 공주제독으로 있으면서 이 지역의 후학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고, 임진왜란시 충절을 보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공주 유생이 소장에서 조헌의 추배를 청하는 논리를 보더라도 우거(寓居)한 옥천, 사절(死節)한 금산, 출수(出守)한 보은에는 각각 조헌을 모신 사우가 있는데, 오직 공주에만 없다고 하면서 추배를 청하고 있다.
다음으로 김장생의 추배는 현종 15년(1674)에 이루어진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한때 서기를 찾아 성의(誠意)에 대한 강론을 한 적도 있는데, 김장생의 충현서원 추배당시 서원 원장은 그의 제자인 이유태로, 이유태의 문집인 『초려문집』에는 그가 김장생의 봉안 시 김장생에게 고한 글[奉安文]이 남아 있다. 김장생의 충현서원 추배에는 ‘그가 머무른 자취가 있다[杖屨處]’는 명분이 제시되고 있다.
송준길의 추배는 숙종 12년(1686)에 이루어진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은 아버지 송이창이 서기의 문인이고, 송이창이 서기에 대해 쓴 제문이 전해질 정도로 충현서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송준길의 충현서원 추배시도는 숙종 8년(1682)부터 있었다. 이때 추배를 주도하는 인물은 유학 성초화(成楚和)였는데, 조정에서는 회덕 유생들의 청으로 이미 숭현서원(崇賢書院)에 합향하였으니 추배하지 말라는 회답을 내렸다. 그 후 숙종 12년에 공주 유학 성초백(成楚栢)이 충현서원의 추배를 다시 청하자, 이때에는 받아들여졌다. 이와같이 송준길의 추배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숙종 12년 당시의 중앙조정이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정권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송시열의 추배는 숙종 39년(1713)에 이루어진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서원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전국 약 70개소에 제향 되었다. 그 가운데 사액서원만도 37개소에 달하는데, 충현서원의 추배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송시열이 ‘머무른 자취가 있다[杖屨處]’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숙종 38년(1712)에 청에 대한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다는 복수설치(復讐雪恥)’가 논의되면서 효종과 송시열이 강조되는 조정분위기의 영향도 받았다.
배향인물 가운데 서원을 설립한 고청 서기는 신분상의 한계로 추배되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와서야 대원군 때 훼철되었던 서원을 중건하면서 함께 배향되었다. 이때의 배향위차는 신분과 관계없이 제향인이 태어난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이존오, 이목, 성제원, 서기, 조헌,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의 순서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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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 배향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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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 배향인(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