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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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康蔡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대야면|서수면 |
집필자 | 김두헌 |
입향 시기/일시 | 고려 말 조선 초 - 채양생(蔡陽生), 채지생(蔡智生)이 개성에서 임피로 낙남(落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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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대명리 -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
세거|집성지 | 임피, 서수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 서수면 일대 |
성씨 시조 | 채송년(蔡松年) |
입향 시조 | 채양생(蔡陽生)|채지생(蔡智生) |
[정의]
조선 시대 군산[옛 임피현] 지역에 세거한 성씨.
[개설]
고려가 멸망하자 그 한을 품고 채양생(蔡陽生)이 손자 채효손(蔡孝孫)과 재당질[7촌 조카] 채지생(蔡智生)을 대동하고 당시 임피현 성산면 대명리 향림곡에 있는 불사(佛舍)로 내려와 은거(隱居)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개정면, 대야면, 서수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채양생의 후손들은 채양생이 소감을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소감공파라고 부르고 있고, 채지생의 후손들은 채지생이 목사를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목사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연원]
평강채씨 시조인 채송년(蔡松年)은 1230년(고려 고종 17)에 홍주에서 일어난 최향(崔珦)의 난을 진압하였고, 1231년(고려 고종 18)에는 몽고군이 침략하자 함경도 철주에서 북계병마사로서 이들을 제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251년(고려 고종 38)에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내다 사망하였다. 이에 경평공(景平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입향 경위]
평강채씨 시조 채송년(蔡松年)의 6세손 채양생(蔡陽生)은 고려가 멸망하자 손자 채효손(蔡孝孫)과 재당질[7촌 조카] 채지생(蔡智生)을 대동하고 당시 임피현 성산면 대명리 향림곡에 있는 불사(佛舍)로 내려와 은거(隱居)하였다. 아들 채왕택(蔡王澤)[채효손의 아버지]은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신(隱身)한 72현인(賢人) 중에 한 명이다.
[현황]
채양생(蔡陽生)과 채지생(蔡智生)이 임피에 입거한 이후 개정면 발산리, 아산리, 통사리, 운회리, 대야면 산월리, 서수면 마룡리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채양생의 후손들은 채양생이 소감을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소감공파라고 부르고 있고, 채지생의 후손들은 채지생이 목사를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목사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채양생의 증손 채담(蔡潭)의 처(妻)는 황희 정승의 손녀이고, 현손 채자침(蔡子沈)의 처(妻)는 양녕 대군의 손녀이다. 곧, 채양생이 임피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은 중앙의 벌족들과 혼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채양생의 8세손인 채겸길(蔡謙吉)은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 지제교겸경연세자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등을 역임하였다. 채양생의 15세손인 채홍백(蔡弘伯)은 1888년(고종 25)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이후 사헌부 장령, 좌랑, 전적, 지평 등을 지냈다. 군산에 거주한 평강 채씨의 현재 인구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