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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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
집필자 | 김두헌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14년 - 김덕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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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88년 - 김덕양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16세기 중반 경 - 김덕양이 논산에서 처가(妻家)가 있는 옥구로 입거함. |
본관 | 광산 - 전라남도 광주시 |
입향지 | 광산김씨 입향지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
세거|집성지 | 광산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 |금광리|고사리 |
성씨 시조 | 김흥광(金興光) |
입향 시조 | 김덕양(金德良)|김시형(金時亨) |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옥구현]에 세거한 성씨.
[개설]
김덕양(金德良)이 논산에서 거주하다가, 16세기 중엽에 처가(妻家)가 있는 옥구로 입거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 대정리, 고사리, 금광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였다. 후손들은 자신들을 광산김씨 경력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경력공은 김덕양의 증조할아버지 김극수이다.
[연원]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신라 신무왕의 아들 김흥광(金興光)이다. 김흥광의 22세손 김국광(金國光)[1415~1480]은 1441년(세종 23)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좌리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광산 부원군에 봉군되었고, 좌의정을 지냈다.
김국광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김극수(金克羞)[1449~1481]가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을 지냈고, 부친(父親)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김극수(金克羞)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경력공파라고 불렀다.
[입향 경위]
김극수(金克羞)의 증손자 김덕양(金德良)[1514~1558]이 논산에서 거주하다가, 16세기 중엽에 처가(妻家)가 있는 옥구로 입거하였다. 김덕양의 장인는 옥구에 세거한, 진주 강씨 어사공파 출신 강상주(姜尙周)이다.
[현황]
김덕양(金德良)이 옥구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 대정리, 고사리, 금광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한편 광산김씨 경력공파이면서 김덕양(金德良)의 방계 후손인 김시형(金時亨)[1731~1817, 시조 김흥광의 33세손, 경력공 김극수의 11세손]이 옥구에 입거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또 다른 광산김씨 경력공파를 이루며 옥구읍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이상과 같이 옥구에는 두 갈래의 광산 김씨 경력공파가 세거하여 왔다. 한 갈래는 회현면 일대에 세거한 김덕양의 후손들이고, 또 한 갈래는 옥구읍 일대에 세거한 김시형의 후손들이다.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광산김씨 경력공파가 대정리 서기 마을에 10가구 42명, 고사리 일대에 17가구 77명[척동 마을 13가구 59명, 금반 마을 4가구 18명], 금광리 일대에 12가구 106명[금광 마을 5가구 26명, 광지산 마을 5가구 27명, 옥성 마을 6가구 25명, 옥삼 마을 6가구 2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조사된 사례가 없어 정확한 인구 현황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