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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600
한자 天主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구민정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개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 초기 4대 교회[예루살렘 교회, 안티오크 교회, 비잔틴 교회, 로마 교회] 중 서유럽 지역에 유일한 로마 교회가 성장하여 이루어진 교회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된 이후, 여러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체계화하고, 로마제국의 전 영역으로 전파되었다. 서로마제국에서 게르만 왕국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서제를 갖추고, 수도원 운동이 정착되면서 교세가 전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가톨릭 교리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유럽에 전하는 매개 역할을 하여, 중세 유럽 뿐 아니라 근대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파]

14세기 말 이후, 유럽인들이 신대륙과 극동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세계적인 종교로 확산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유교 윤리와 갈등이 있기도 했으나, 유교 윤리와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유교적 논리를 통해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여 유교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어갔다.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는 독특한 전파 과정을 거쳤다. 서양의 학문을 의미하는 서학(西學)의 일부로서 일부 재야 지식인들에게 알려졌다. 서양인들의 종교라는 의미의 서교(西敎) 또는 천주교(天主敎)로 불리웠다. 주자학이 노론 일색으로 편협해지면서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며,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수용되었다.

1784년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이 모여 자체로 세례식을 치르고 신앙 모임을 하는 것으로 자생적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천주교는 조선 전체로 확산되었다. 곧 중국에서 사제가 파견되었으며, 이어지는 조선 정부의 탄압 속에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최양업[토마스] 신부 등 조선인 사제가 탄생하였다.

[호남 지역의 천주교 전파]

전라도에는 유항검윤지충 가문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또한, 신유 박해와 병인 박해를 피해 고산으로 모여든 신자들은 그곳에 정착하거나, 다시 살길을 찾아 전라도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다. 주로 산간 지방에서 숯가마를 짓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20세기 초 아시아의 가톨릭 교회는 점차 현지인들이 운영 주체가 되는 추세였다. 전라남·북도 교회의 책임을 맡고 있던 대구 교구장 드망즈[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주교는 한국인 신부와 프랑스인 신부를 평등하게 대하도록 했으나, 한국인 신부에게 한국 교회의 운영을 위임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교구가 독립하는 추세에서 한국인 주교를 임명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에 감목 대리구(監牧代理區)를 설정하고, 1931년 5월 전주 본당 주임 김양홍 신부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 6년간의 수련 기간이 지난 후, 1937년 전라도 감목 대리구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분리되어 전라북도 지역을 아우르는 전주 자치 교구가 승인을 얻게 되었다. 제1대 주교에 김양홍 신부가 임명되었다.

한국 천주 교회는 외국 선교사의 선교 활동에 의해 교회가 창설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조선인]의 자발적인 연구와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 창설되고 자율적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세계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교회 성립의 역사이다. 전주 교구가 자치 교구로 설정된 것은 한국 교회사의 특성과 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일이었다. 전주 교구 이전에 이미 대구, 연길, 원산, 평양에 교구가 설정되어 있었으나 전주 교구는 최초의 ‘한국인[조선인] 자치 교구’였던 것이다.

[군산 지역의 천주교 전파 ]

1931년 본당으로 승격한 군산 본당[현 둔율동 성당]은 전라도 감목 대리구 소속에서 전주 자치 교구 소속이 되었다. 1876년 개항 이전의 군산항은 조세로 걷힌 곡물을 실은 세곡선이 거쳐 가는 작은 항구가 형성되어 있는 어촌이었다. 충청도와 전주 인근 지역에서 박해로 흩어진 천주교 신자들은 옥구, 임피 지역에 소규모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고, 항구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지금의 군산 시가지에서는 거주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개항 후, 배편으로 전라도에서 서울을 오가던 선교사들이 군산항을 이용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의 기착지 역할을 할 본당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 9월 나바위 성당의 베르모렐 신부와 전주 성당[현재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는 주교에게 본당 설립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산에서 확인된 신자 수는 1가구뿐이었으므로 설립은 불가능했다.

몇 년이 지난 1915-6년경 김마리아 여사의 주선으로 시내 영동에서 공소를 시작하고, 나바위 성당 베르모렐 신부를 청해 판공 성사를 보았다. 김여사는 공소를 열기 전부터 교우들을 수소문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옹기 장수 부인이 목에 성의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부인이 사는 만동리 토점을 찾아가 여러 교우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그들과 합심해서 영동에 공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김마리아 여사는 그들의 가족을 개종시키고, 전교에 전념하였다. 이 후 늘어난 신자들이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게 되고, 1928년 신자들이 성금을 모아 열네 칸 기와집을 매입하여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신자들의 노력이 가시화되자, 1929년 5월 대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군산 본당 설립을 위해 김영구 신부를 나바위 성당 보좌 신부로 임명하였다. 김 신부는 나바위 성당에 머무르며 군산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1929년 당시 군산 공소 신자 수는 일본인을 포함하여 250여명이었다.

신자들은 1930년 둔율동 군산 보통학교[현재 군산 중앙 초등학교] 옆에 있는 대성원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수하여, 1931년 본당으로 승인 받았다. 김영구 신부는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해방 이후,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의 열정은 이어져 대야 성당이 설립되었다. 수녀들은 고아들과 윤락 여성들을 돌보는 사회 복지 사업을 시행하였다. 또한 공단 지역이 확대 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운동도 활발히 전개 되었다.

[현황]

군산 지역의 천주교 교세는 점차 확대되어, 2013년 현재 본당이 14곳이 되었다. 최근에, 새만금 간척지 개발 사업과 도시화의 진행으로 세기 전환기에 인구가 일시적으로 증가하고, 아파트 단지들이 증가하여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농촌 인구의 감소와 지속적인 유입 인구의 감소 추세 속에서 신자 수의 변동은 정체 상태에 있다. 인구 구성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선교 활동과 사목 활동의 모색이 필요해지는 가운데,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한국 교회의 특수성 속에서 군산 지구의 교회 공동체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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