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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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Changing of Gyomun Intersection in Inhwaj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현숙 |
[정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위치한 주요 교차로인 교문 사거리의 어제와 오늘.
[개설]
교문사거리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서 경기도 양평군으로 가는 6번 국도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서 구리시로 넘어오는 43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이자 구리시의 관문이다. 오래전부터 서울특별시에서 구리시를 관통하는 중심 사거리로서 외지인들에게 구리 지역을 오가는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해 오던 곳이다. 현재는 구리역이 들어선 구리시 수택동에 비해 상업 시설은 쇠락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차량이 사통팔달로 시원스레 뻗은 교문사거리를 이용하고 있다. 이에 구리 지역의 중심을 지켜 온 교문사거리의 오래된 사진을 통해 거리의 흔적을 다시 보고 일대의 지나간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인화지가 남긴 찰나의 순간]
우리는 저마다 어느 곳에서든 살아가면서 수많은 풍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이 내 집 앞 좁은 골목이든, 버스 정류장이든 매일 매순간 시간 속에서 흐르듯 어떤 장소와 거리를 만나고 무심코 지나친다. 그렇게 지나온 수많은 풍경들은 어느새 우리 기억 속에서 잊히기 마련이고, 그 장소들 또한 조금씩 변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어떤 특정한 장소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곳에 익숙해져서 주변을 보려는 눈길은 게을러지고 기억의 회로들은 게을러진 감각만큼 무뎌진다. 낯선 것이나 새로운 것에만 반응하는 감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보던 그 지루한 풍경들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장소를 영원히 떠나기도 하고 그 공간들은 조금씩 혹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상전벽해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덧입혀지면서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그 익숙했던 장소들을 다시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장소는 그 모습 그대로 결코 남아 있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 장소를 불러낼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이 보고 싶다면 앨범을 펼치면 된다. 그곳에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우리 기억 속에서마저 흘러가 버릴 것 같은 소중한 순간들이 곱게 접힌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구리를 향해 가는 길]
교문사거리는 구리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리시 중심부에 있고, 예부터 서울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이용 차량이 많았다. 구리 지역을 가려면 거의 전 지역이 교문사거리를 거쳐야 할 정도로 구리시의 교통 요충지이다. 서울에서 망우리를 지나 구리로 들어서는 관문과도 같은 네거리이기에 자연스레 교문사거리에서부터 돌다리까지 상업이 발달하였다. 그러하기에 구리시 승격 이전에도 구리읍 사무소가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교문사거리에서는 고개를 젖힐 만큼의 높은 빌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옛 사진이나 현재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층 건물이나 단층 건물만이 존재해 왔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상 일대의 용도 지역이 1종으로 대부분 자연 녹지 지역이기 때문에 고층 건물은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 승격 이후 구리시청이 교문동의 현재 청사로 이전되고, 구리시 수택동에 구리역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행정 및 상업 지역으로서의 기능도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대신 주거 단지와 소규모 공장, 상업 시설이 주변으로 뒤섞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건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교문사거리에는 종합 병원인 한양 대학 병원이 자리 잡고 있어 교문사거리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교문사거리는 정체를 걱정할 만큼 차량 이용이 많았다. 자동차가 급속도로 늘어난 1980년대 후반에 이르자 차량의 증가에 의해 구리 관문 역할을 하던 교문 사거리의 교통 체증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서 구리시는 교문 사거리의 교통 정체를 해소하기 위해 교통 체계 개선 대책을 세웠다. 1991년에는 국도변 정비 사업을 시행했고, 1994년까지 교문사거리 통과 교통 분산을 위해 우회 도로 및 연결 도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또한 2005년에는 군사 시설로 남아 있던 대전차 방호벽을 철거하면서 답답했던 교문 사거리 미관이 훨씬 시원해졌다.
[1990년대 말 교문사거리 일대 주민의 소소한 모습들]
1990년대 말 서울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구리시에서 신혼살림을 꾸린 부부들이 적지 않았다. 젊은 부부들이 구리에 정착한 이유는 구리에 연고가 있어서도 아니고 직장 때문도 아니었다. 순전히 서울의 전세난 때문에 떠밀리듯 옮겨 오게 된 것이다. 구리시가 서울의 강북에서 멀지 않은 데다가, 강남과의 교통도 좋다는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구리에서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었던 이들 외지인에게도 어쩌면 교문사거리는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출장이었든 여행이었든 서울시 강북구에서 다른 지방을 다닐 때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 말 교문사거리 일대의 주택가는 현재와는 달리 다세대 또는 연립 주택이 대부분이었고, 아파트는 1988년에 준공된 원일 아파트 정도였다. 다세대 또는 연립 주택들은 1970~1980년대에 건립된 것이 대부분인데, 슈퍼마켓이나 식당, 세탁소, 쌀집, 정육점 등의 상가들과 함께 동네를 구성하였다. 주택들 사이로는 소규모 공장들도 많았는데, 오가는 사람들은 적어도 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소규모의 골목 식당들은 점심시간이면 늘 손님으로 가득했다.
교문동 일대 주민들은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 교문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널찍한 사거리였던 것에 비해 눈에 띄는 상업 시설은 적었다. 다만 주변의 경관에 비해서 월등히 커 보였던 한양 대학 병원이 지금보다 훨씬 눈에 띄었고, 그 앞으로 현재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협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1990년대 말 교문사거리 주변은 정비된 주택가도 아니었고 높고 커다란 빌딩들이 즐비했던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교문사거리에는 구리 전 지역은 물론 서울시 강남과 강북으로 다니는 버스가 많아 교통이 편리했고, 금융 업무는 농협으로로 충분했다. 게다가 농협 안에는 마트[하나로 마트]도 있어 이용이 편리했으며, 돌다리 쪽으로 조금 걸으면 2016년 현재도 여전히 전통 시장으로서 인근 지역을 대표하고 있는 구리 시장[구리 전통 시장]이 있어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교문사거리 일대는 비록 도시도 시골도 아닌 조금은 어수선하고 어정쩡한 동네였지만 정겨움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교문사거리]
교문사거리 주변 경관의 모습은 어찌 보면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리적 이점 때문인지 교통 흐름상의 이유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아파트 분양 모델 하우스가 하나씩 들어와 있고, 농협 옆 사거리 코너에 작은 공원이 생겼다는 점이다. 1990년대 말에도 아파트 분양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제법 많은 고층 아파트들이 사거리 주변으로 보인다. 한양 대학 병원은 여전히 랜드 마크처럼 교문사거리를 지키며 우뚝 서 있다. 수택동에 구리역이 들어서고, 그 앞으로 큰 공원이 만들어졌으며, 롯데 백화점이 입점하는 등 내로라하는 빌딩들이 즐비해진 것에 비한다면 어쩌면 교문사거리는 그리 변하지 않은 듯 보인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사거리이다 보니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바뀔 뿐 길이 바뀌지는 않기에 어쩌면 많이 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교문사거리는 여전히 많은 차량들이 오가는 교차로이다. 세월의 덧입힘으로 흑백 사진이 컬러 사진이 되듯 조금씩 거리의 빛깔이 달라질 수는 있어도 교차로라는 활기찬 기운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