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2002 |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Imjinwaeran) and struggle of the righteous army in Guri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서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의병(義兵)의 활동.
[개설]
임진왜란 중에 양주 목사(楊州 牧使)로 임명된 고언백(高彦伯)은 검암산[구릉산]에 보루를 쌓고 적을 격퇴하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발발 직후 20여 일만에 한양이 점령당하고 이미 그 이전에 선조(宣祖)와 조정이 의주로 피난할 만큼 당시 조선의 국력은 취약한 상태였지만, 그 조짐은 일찍부터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燕山君) 이래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의 치열한 갈등이 이어졌고 사림의 득세 이후에도 각 붕당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면서 조선 조정은 정상적인 정치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 초기의 국방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이 등장할 만큼 군사력도 미약한 처지였으므로, 전쟁 초기에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제외한 영역 대부분을 상실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군의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늘어난 전선과 보급선(補給線)의 유지가 어려워지고 낯선 환경으로 인해 병력 손실이 늘어나면서 왜군의 공세는 점차 둔화되었다. 특히 본래부터 활동하던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지리 조건을 활용해 독자적으로 혹은 관군과 연합해 왜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의병들의 활동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승리와 육군의 반격 및 명군의 원조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고, 구리 지역에서도 이러한 의병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는 양주의 해유령에서 유도대장 이양원과, 부원수 신각, 안성에서 홍계남 부자와 박춘무, 강화에서 우성전과 김천일의 활약 등이 있었다. 특히 해유령에서 거둔 승리는 북상하던 왜병과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해유령 전투에서 정희인, 박명현 등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 교동(喬棟) 향리 고언백은 양주에서 왜적의 방어를 자청하였다.
[경과]
조선 후기 김정호가 편찬한 역사 지리서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양주(楊州)[지금의 구리 지역 포함]의 검암산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언백이 쌓은 보루 2곳이 있는데, 고언백이 스스로 양주로 가서 적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자 조선 조정은 양주 목사로 임명해 왕릉들을 보호하도록 했고 고언백은 산 정상의 험한 곳에 주둔하며 이 지역으로 접근하는 적을 격퇴했다고 한다. 또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통해 당시 고언백이 양주 목사와 더불어 양주 주차 방어사(楊州 駐箚 防禦使)를 겸하며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렸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구리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왕릉들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불리했던 전세의 반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