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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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丙浩 |
영어공식명칭 | Seo Byeongho |
이칭/별칭 | 송암(松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묻혔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가계]
서병호(徐丙浩)[1885~1972]의 호는 송암(松嵓)이며, 서경조(徐景祚)의 둘째 아들로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다. 서경조는 장로교 최초의 목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다.
[활동 사항]
서병호는 1905년 경신 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설립한 해서 제일 학교(海西第一學校)와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평양 대성 학교(大成學校), 그리고 모교인 경신 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南京] 금릉 대학(金陵大學)을 다녔다.
1919년 초에 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상해 영국 조계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강력히 추진할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신한청년당에서는 기관지 『신한 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간하여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신한청년당은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서무부 등의 각 부서를 두고 당원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독립운동의 선봉 부대로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한청년당은 신규식(申圭植)이 중심이 되었던 동제사(同濟社)의 핵심 인물들이 결성한 조직 단체이다. 당시 서병호는 신석우(申錫雨)·여운형·선우 혁·조동호·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동제사의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결성과 함께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대표로 파견하여 대외적으로 민족 대표 기관의 임무를 실행하였으며, 동시에 국내 및 노령(露領), 일본 등 각지 동포 사회에도 세계 대세에 따르는 독립운동을 펴게 하기 위하여 당의 중요 인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922년 12월 중순 서병호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의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해산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여 해산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된 뒤 제헌 의정원 내무위원이 되어 정부의 정무 조사 등을 진행하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동지의 연락과 독립 자금 모금에 전력하였다. 또한 교육과 사회 사업에도 뜻을 두어 대한적십자회를 창설, 난징[南京]·미주·하와이 등지에서 모금한 돈으로 간도 지방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도왔다. 1923년 중국 상하이에 남화 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하고, 1933년 상하이의 인성 학교(仁成學校) 이사장, 상해 한인 기독교 청년회 이사장, 한교 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1947년 귀국하여 새문안 교회 장로와 서울 중앙 기독 청년회 이사, 경신 학교 이사를 지냈고, 1950년 경신 학교 이사장이 되었다. 6·25 전쟁 중 부산에서 대한 기독교 청년회 연맹 전시 대책 위원회 위원장, 맹인 협회·농아 협회 이사장으로 활약하였고, 환도 후에 기독교 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53년 경신 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기독교 아동 복지회 재단 이사 및 안양 기독 보육원 재단 이사 등을 맡아 사회 복지 분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 경신 학교에서 정년 퇴직한 뒤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기 노회 부회장을 지냈다.
[묘소]
서병호의 묘는 망우 공원묘지에 있었으나 2008년 11월 18일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연보비를 세웠는데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하니, 나라와 나와의 관계를 절실히 깨닫는 국민이 되자.”라는 서병호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