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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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昌浩 |
영어공식명칭 | An Changho |
이칭/별칭 | 도산,산옹,섬메,신도생,안광택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묻혔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가계]
안창호(安昌浩)[1878~1938]의 어버지는 안흥국(安興國), 어머니는 제남 황씨다.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필명은 산옹(山翁)·섬메·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異名)은 안광택(安廣宅)·안창호(晏彰昊) 등이다.
[활동 사항]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서당에서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에게서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 학문에 눈을 뜨고,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 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안창호는 국력 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고향을 떠나 상경해 정동 거리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 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밀러 학당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 지부 조직을 맡게 된 안창호는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 등과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 고향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 학교로 남녀 공학인 점진 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한 후 그 이튿날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학으로 초등 과정부터 공부를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 향상을 위해 미주 한인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1905년 4월 5일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조국 광복을 목표로 한 정치 단체인 공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공립 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 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 협회를 지도하였다.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이듬해인 1906년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 도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나라 유학생 단체인 태극 학회(太極學會)의 청년들을 만나 국내 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1907년에 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며 민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평양에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 기관인 태극 회관(太極會館)을 세웠으며,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또한, 1909년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 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붙잡혔다가 잠시 석방된 틈을 타 1910년 4월 중국인 소금 상선을 타고 중국의 웨이하이로 탈출하였다. 안창호는 중국 칭타오에서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던 중 강제 병합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러시아에서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 보호와 민족 통합을 주선하였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한 뒤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그해 9월 미국으로 갔다.
안창호는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 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신한 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 정부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고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였으나, 1921년에 임시 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였고, 1923년 국민 대표 회의가 개최되어 부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8년 다시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2년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폭탄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 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同友會事件)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그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출옥하였으나 이듬해 3월 경성 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자신이 아꼈으나 먼저 죽은 비서 유상규의 묘 옆에 묻어 달라는 안창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1973년 11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 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도산 공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으며 2012년 1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센터 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