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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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勞動團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소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0년 8월 26일 -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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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7월 -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소비조합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5월 -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 임금노동조합, 토목공조합, 자동차운전사조합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8월 - 광주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준비회 탈퇴 및 독자 활동 전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8월 - 광주노농청년회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 광주노동공제회 노동부와 농민부 분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11월 - 인쇄직공친목회에서 광주인쇄직공조합으로 변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11월 - 광주철공조합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2월 5일 - 광주완차부조합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2월 20일 - 정미노동조합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2월 28일 - 전남노동연맹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3월 - 광주이발직공조합 조직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노동 단체 및 노동 운동.
[개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1920년에 설립된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직업별 조합들이 조직되었다. 광주 지역의 경우 일제의 행정 및 경찰 업무가 집중된 관계로 인쇄업이나 운수업 등이 약간 활성화되어 있었고, 1930년대 중반 대규모의 방적공장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노동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 노동 단체와 노동 운동: 노동 운동의 형성기]
1920년 8월 26일 근대적이고 전국적인 연대를 갖는 전라남도 광주 지역 노동 운동의 시작인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는 1921년 10월부터 노동 야학을 시작하여 보통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최초 입학생은 노동자 90여 명이었다. 또한, 1923년 3월 광주청년회와 함께 7개 강연대를 조직하여 광주군 내의 7개 면에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강연 활동의 성과로 인근 14개 면에 소작인회가 조직되었다. 1921년 7월 광주소비조합을 조직하고, 12월 노동자합숙소도 설치하였다. 1923년 5월 임금노동조합, 토목공조합, 자동차운전사조합을 연이어 조직하며 조선노동공제회 지방 지회 중 진주지회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지회로 꼽혔다. 1923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준비회를 탈퇴하고 광주노동공제회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8월에는 광주노농청년회가 설립되어 노동자 및 소작인의 생활 상태 조사,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 등을 조사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5년 말에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의 분리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광주노동공제회에서 노동부와 농민부로 분리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청년 단체와 노동 단체의 갈등도 나타났는데,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의 대립이 심화되어 1926년 1월에는 광주청년회원들이 광주노동공제회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직업별 조합이 조직되었다. 1919년에 조직된 인쇄직공친목회가 1925년 11월 광주인쇄직공조합으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달에 광주철공조합이 조직되었다. 1926년 2월 5일에는 40여 명의 인력거꾼 모임이 완차부조합으로 조직되었고, 2월 20일에는 정미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뒤이어 3월에는 광주이발공조합이 조합원 26명으로 조직되었고, 4월에는 자유노동조합이 조합원 170여 명으로 조직되는 등 다양한 직업별 조합이 조직되었고, 파업을 하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기록되는 파업은 1921년 4월 광주면 누문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에 있던 목산인쇄소 조선인 인쇄공들의 동맹 휴업이었다.
1926년 2월 전라남도 노동 운동의 지도기관 조직을 위해 전남노동연맹 발기준비회가 개최되었다. 전남노동연맹은 사회 운동 진영의 통일 과정에서 '전라노농연맹회'와 통합하여 단일한 도 단위 노동·농민 운동의 지도기관을 조직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일제의 집회 금지 조치로 인하여 창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1920년대 초 3.1운동과 6.10만세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점차 지방으로 조직화해 갔으며 지하로 숨어들었다. 항일운동의 양적 확대를 위해 표면적으로는 합법화된 여러 가지 노동 및 농민 운동을 벌이면서 내면적으로는 지하 운동을 벌여 나갔다. 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청년연맹총연맹 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30년대 노동 운동: 전남노농협의회와 방적 여공 중심의 노동 운동]
1931년 8월부터 조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12월 각지의 대표자 수십 명이 광주에서 회합하여 전남노동협의회가 설립되었다. 내부 조직으로 조직부·노동농민부·반제부(反帝部) 등을 두고, 검거될 때까지 전라남도 각지에 100명가량의 조직원을 구성하여다. 전남노농협의회는 전남노농협의회 임시사무국과 광주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전라남도에 흩어져 있던 노동·농민·독서회·사회과학연구회·반제동맹 등 15개 운동 단체가 통합된 것이었다.
전남노농협의회는 각 부문 운동 단위를 만들고, 다른 단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려 하였다. 하지만 전남노농협의회는 전라남도 방면 책임자인 김상혁, 이우적이 검거되면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 1932년 봄에 해체되었다.
1927년 도시(道是)제사공장, 1930년 종연(鐘淵)방적 광주공장과 약림(若林)제사공장이 광주에 건립되고, 제사 노동자의 92% 이상이 여공이 되면서 노동 운동의 중심은 여성 노동자들로 옮겨 갔다. 방적 여공들이 처지와 노동여건이 열악한 수준이어서 이들의 노동 운동은 자연발생적이고 방어적이었다. 보통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근속연수가 1년이 못 되는 여공이 47%나 되었다. 낮은 임금과 더불어 각종 벌칙을 받았는데, 벌금으로 임금을 공제하거나 식사 금지, 무차별 구타가 다발하였다.
이런 이유로 1929년 도시제사공장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여 남녀 직공 300명이 공장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1931년에도 일본인 감독이 여공을 구타·졸도시켜 700명 남녀 직공들이 작업을 중지하고 항의를 하였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쟁의 이외에도 탈주를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졌으며, 사회 운동가들이나 학생들의 노동자들을 향한 선전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일제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부분적인 파업이 발생하였다. 1942년에는 여공들이 일본인 감독의 인격 모독에 반발해 작업 거부를 하였고, 남자들도 가담하여 소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파업으로 수십 명의 여공들이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