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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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明 |
영어공식명칭 | Kim Jaemyeong |
이칭/별칭 | 김헌식,김려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 김재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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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김재명 흥학관 교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5월 - 김재명 광주청년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9월 14일 - 김재명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1월 26일 - 김재명 광주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3월 - 김재명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김재명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0월 - 김재명 병보석으로 석방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1월 12일 - 김재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김재명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향곡리 145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재명(金在明)[1900~1930]은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76]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헌식(金憲植), 김려수(金麗水)이다.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직속으로 학생위원회를 설치하고, 3.1운동 10주년 기념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8년 7월 검거되어 수감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김재명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24년 흥학관(興學館) 교사로 재직하였다. 흥학관은 1912년에 세워져 민족운동의 주요 활동 무대로 사용되었는데, '구시청 사거리'라 불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재명은 흥학관에서 강의 중 민족의식을 주장하며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조선 동포가 배움이 없었기 때문이니 마땅히 배움에 힘써 조선을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며 학생들에게 주장하였다.
1925년 5월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는 방안으로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에 가입하였다. 초기에 광주청년회는 강석봉(姜錫奉), 지용수(池龍洙), 조준기(曹俊基), 최한영(崔漢永), 김태열(金泰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6년 9월 14일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어 전라남도 광주 지역 사회운동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7년 3월 조직된 제3차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에서는 김재명을 고려공산청년회 전라남도 책임비서로 광주 야체이카(yacheika)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26일 광주청년회관에 2000여 명의 회원이 모여 광주청년동맹(光州靑年同盟)을 창립하였다. 이 대회에서 김재명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경과 보고를 진행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신간회 광주지회 대표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1월 29일 김재명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려공산청년회 야체이카는 전라남도 광주 지역 학생 조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8년 2월 27일 제3차 조선공산당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3월 중순 제4차 조선공산당 전국대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러자 고려공산청년회 직속으로 학생위원회를 설치하고, 3.1운동 10주년 기념 시위를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다.
1928년 4월 12일 전라남도 광주, 송정 등지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 '불온 문서'가 뿌려지고 전라남도 각 사회 단체에 여러 통의 선전문이 발송되었으며, 전라남도 경찰부장 등에게 협박문이 보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일제는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 정보를 탐지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주요 인사를 대대적으로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재명이 검거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192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은 김재명이 폐병으로 수감 생활이 어려워지자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1930년 1월 12일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