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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69
한자 朴寬賢
영어공식명칭 Bak Gwanhy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53년연표보기 - 박관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67년 - 박관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70년 - 박관현 광주동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73년 - 박관현 광주고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78년 - 박관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78년 - 박관현 광주공업단지 노동자 실태조사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박관현 전남대학교 사회조사연구회 창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박관현 들불야학 강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80년 -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82년 7월 - 박관현 5.18민주화운동 주동자로 체포되어 광주교도소 수감
몰년 시기/일시 1982년 10월 12일연표보기 - 박관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10월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앞산에 안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11월 13일 - 고향마을 앞산에서 5.18구묘지로 이장
출생지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학교|수학지 광주수창초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금남로 99[북동 102]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광주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302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지도보기
활동지 들불야학 -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광천동 지도보기
활동지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지도보기
활동지 광주공업단지 - 전라남도 광주시
활동지 광주교도소 - 광주광역시 북구 북부순환로 396 지도보기
묘소 5.18구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85[수곡동 산 29-2]지도보기
성격 민주화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정의]

1980년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끈 학생운동가.

[개설]

박관현(朴寬賢)[1953~1982]은 1953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사이에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광주시의 명문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1965년 불갑국민학교에서 광주수창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광주동중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73년 졸업하였다. 대학입시에 떨어져 재수하던 중 1974년 군에 입대하여 1977년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1978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학내 민주화운동을 이끌면서 수배되어 서울특별시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체포되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재소자와 양심수의 인권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였다. 교도소 당국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여러 차례 단식을 반복하다가 박관현은 급성 심근경색증에 걸렸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1982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박관현전남대학교에서 전학기, 양강섭, 정용화를 만나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학년 2학기 초 군대를 제대한 뒤 복학한 고등학교 동창 장석웅은 박관현이 학생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김상윤·윤한봉 등 선배들을 박관현에게 소개해 주었다.

1978년 12월부터 1979년 9월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의 광주공업단지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하였다. 이 조사를 계기로 들불야학 강학들과도 만나기 시작하였다. 박관현은 노동자 실태조사와 들불야학의 강학들을 통해 노동자 현실을 접하게 되었고, 곧바로 들불야학 강학으로 합류하였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1980년 봄 개강과 함께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민주적인 학생회 건설, 민주화 일정 요구 등을 주장하였고, 4월에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있었다. 박관현전남대학교 학생운동권의 지지를 받아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월에는 전국이 들끓었고, 전남대학교에서는 박관현이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8일부터 15일까지를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설정하였고,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가두로 진출하여 옛 전라남도청 앞 광장에서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였다. 집회에서 박관현은 탁월한 웅변력과 일사불란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5월 17일 계엄령이 확대되고 18일부터 예비검속이 시작되자 박관현은 검거를 피해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섬으로 피신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받으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관현광주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광주시가 진압된 뒤 목포를 거쳐 서울로 상경하였다. 박관현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동에 있는 이모집에 기거하면서 화랑섬유에 취업하였다. 1982년 화랑섬유 공장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5.18민주화운동 수배자를 찾는 텔레비전 뉴스가 나왔는데,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 박관현을 알아보고 파출소에 신고하였다. 박관현은 곧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임낙평, 신영일 등 후배들을 만났다.

1982년 7월 교도소의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였으나 교도관에게 폭행과 강제 급식을 당하였다. 8월에는 재소자와 양심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2차 단식에 돌입하였다. 단식 10여 일째에 박관현은 1심 결심 공판을 받고,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등으로 징역 10년을 구형받았다. 박관현은 최후 진술에서 탁월한 언변을 보이며 재판을 방청하였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82년 10월 재소자 처우 개선을 약속하였던 교도소 당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3차 단식에 돌입하였다. 결국, 광주교도소는 완전 처우 개선을 약속하였으나 박관현은 거듭된 단식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박관현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자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장기 단식으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상태가 더욱 나빠지자 광주교도소 당국은 구속 집행정지를 결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박관현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염원하였으나 1982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

[묘소]

1982년 10월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고향마을 앞산에 안장되었다가, 1987년 11월 13일 5.18구묘지 민주열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박관현을 비롯한 7명의 들불야학 열사들의 정신을 기리는 '들불기념사업회'가 2004년에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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