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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394
한자 須皮亞女學校
영어공식명칭 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인가 시기/일시 1908년 2월 - 광주여학교 설립 인가[대한제국 정부]
개교 시기/일시 1908년 4월 1일연표보기 - 광주여학교 개교
개교 시기/일시 1945년 12월 5일 - 수피아여자중학교 재개교[6년제]
폐교 시기/일시 1937년 9월 6일연표보기 - 수피아여학교 폐교
개칭 시기/일시 1911년 9월 1일연표보기 - 광주여학교에서 수피아여학교로 개칭
최초 설립지 광주여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현 소재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백서로 13[양림동 256]지도보기
성격 사립고등학교
설립자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
전화 062-670-3011[교무실]|062-670-3000[행정실]
홈페이지 http://speer.gen.hs.kr

[정의]

근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와 함께 전라도 광주 최초의 중등학교로 꼽힌다. 1907년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과 오웬(Clement C. Owen) 목사는 개신교 신자의 자녀[남 1명, 여 3명]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는 유진 벨 목사 사택 내 사랑방으로, 지금의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일대이다. 초창기에는 외국인 선교사를 꺼리는 탓에 학생들이 없었다. 그러다가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유진 벨 선교사의 부인과 엄언라[미국명 Ella Graham]가 변요한[미국명 John F. Preston] 목사의 사택에서 여학생을 따로 모아 가르쳤다. 그 후 1908년 2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광주남학교와 광주여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 설립 승인을 받게 되었다.

수피아여학교가 정식 명칭이 된 것은 1911년의 일이다. 1911년 5월 미국의 스턴스(M. L. Stearns)로부터 5,000달러를 기증받은 학교는 3층의 회색 벽돌 건물을 지어 새로운 교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턴스는 일찍 죽은 자신의 동생인 제니 스피어(Jennie Speer)를 애도하는 뜻에서 새 건물의 이름을 '수피아홀(Speer Hall)'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학교의 공식 명칭인 수피아여학교가 되었다. 1912년에는 고등과[중학교] 4년제와 보통과[소학교] 6년제의 인가를 받았다. 1927년에는 미국 남장로회의 부인 전도회에서 윈스보로(Mrs. Winsborough)의 주도로 모금한 5만 달러를 기증받아 지금의 자리에 붉은 벽돌 본관 건물을 준공하여 윈스보로홀이라 하였다. 1928년 4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따라 보통과가 폐지되고 고등과만 남게 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자 수피아여학교의 학생들 또한 시위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시위 참여가 원인이 되어 1930년 1월 28일 조선총독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수피아여학교에 무기한 휴교 조치를 내렸다. 결국 1937년 9월 10일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일학교와 함께 폐교되었다. 수피아여학교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동문들의 복교 노력으로 6년제 수피아여자중학교로 재개교하였다.

[교육 활동]

1908년 유진 벨 선교사의 사택에서 시작한 광주 선교부의 광주여학교는 1911년 구애라[미국명 Miss Anna McQueen] 교장의 노력으로 학교의 기초를 갖출 수 있었다. 선교부 직원 김윤수의 딸 김명은, 최흥종 목사의 딸 최숙, 서병균의 딸 서영순 3명으로 시작한 수피아여학교는 처음에 보통과만 설치되었으나 1911년 4년제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수피아여학교의 보통과는 4년제였으나 1914년에 학제 변경으로 6년제가 되었다. 1928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보통과를 폐지하고 수피아의 보통과를 광산학교로 개명, 이관하였다. 보통과에서는 성경, 문학, 한문, 산학, 역사, 지리, 어학, 이학, 음악, 도서, 체조를 가르쳤으며 1년 3학기제로써 주 5일간 수업을 하였다. 1911년에 개설된 수피아여학교의 고등과는 4년제 중학과정으로 출발하였다. 수피아여학교 고등과는 1915년 3월 첫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는데 박애순과 표재금이다. 두 사람은 졸업 후 서울 정신여학교 사범과를 마친 후 수피아여학교에 돌아와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수피아여학교와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발생하였고, 광주에서는 3월 8일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미뤄지고, 3월 10일에 시위가 발생하였다. 3월 5일 김철 등 17명의 인사가 양림동에 있는 당시 숭일학교 교사 남궁혁의 집에 모여 3월 8일을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이 중 수피아여학생의 동원은 재학생 홍승애의 담당이었다. 이튿날인 3월 6일 다시 남궁혁의 집에 모인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외 12명은 학생들과 기독교인의 거사를 결의했고,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지하실에서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 때 입은 소복을 뜯어 1인당 10매씩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박애순은 수피아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20매씩 배포하여 만세 시위행진 때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시위를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 사직공원에서 울려 퍼진 숭일학교 학생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 학생, 동네 사람들,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이 광주천 부동교 일대로 몰려나왔다. 이 시위 행렬은 광주경찰서[옛 충장서점 자리]까지 몰려갔는데, 이곳에서 일본 경찰과 긴급 출동한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1백여 명이 체포되고 많은 이가 부상당하였다. 수피아여학교 관계자들은 16세 이상의 학생과 교사 23명이 체포되어 징역 4개월부터 1년 6개월까지 모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자 수피아여학교의 학생들 또한 시위에 참여하였다. 1930년 1월 28일 수피아여학교 재학생들은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예비 검속에 의해 발각되어 재학생 정옥순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930년 2월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백청단(白靑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백청단의 의미는 백의민족의 청년들이라는 뜻이었다. 백청단의 대표는 당시 수피아여학교 재학생 조아라였으며, 김수진·염인숙·김나열·최풍호·최기례·서복금 등의 회원이 있었다. 백청단의 존재는 1932년 12월경 단원 중 한 학생이 사상 혐의로 가택 수색을 당하게 되어 그의 일기장에서 발각되고 만다. 1933년 1월 9일에는 백청단원 다수가 피검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특히,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서평 선교사가 운영하던 이일학교의 교사로 있던 조아라는 수업 도중 연행되는 고초를 겪고 1개월 후 석방, 교직을 박탈당하였다.

[현황]

수피아여학교는 2021년 기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로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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