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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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明林野調査事業 |
영어의미역 | Gwangmyeong Forest Survey Projec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철원 |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경기도 광명 지역에 실시한 대규모 임야조사사업.
[개설]
임야조사사업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식민지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전국 임야의 소유권을 재확정하고자 추진한 사업으로, 1916년 시험적인 준비 조사를 거쳐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조사와 측량 등을 마쳤다. 이에 부수하는 심의 처리 등의 사무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주관으로 1919년에 개시하여 1935년에 완결되었다.
[내용]
1918년에 현재의 광명 지역인 시흥군 서면에서 임야조사사업을 마치고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임야조사부가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물에는 일직리, 소하리, 하안리, 철산리, 가학리, 노온사리, 광명리에 대한 집계표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임야조사사업을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938년 조선총독부 농림국에서 작성한 『조선임야조사사업보고서』에 의하면, 토지 조사에서 제외된 임야의 경계를 법적으로 확립하여 혼란스러웠던 권리 관계를 명백히 함으로써 인민의 이용후생에 이바지하고 한국 임정(林政) 정비에 자료를 제공하는 데 사업의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임야에 근대적 등기제를 도입하여 확실한 사유림만을 공인하고 종래의 사유림을 국유림으로 강제 편입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유림이 국유림으로 편입된 후 일본인 및 일제에 결탁한 일부 한국인들에게 대부, 불하되었다. 이처럼 임야조사사업은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양축으로 기능했으며, 많은 농민층이 사유림을 박탈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시흥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일본인들의 삼림 강탈 사례가 적었는데, 이는 시흥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은데다 관내의 삼림이 수탈의 대상이 되기에는 수종이 비경제적이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광명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