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05 |
---|---|
한자 | 抗日運動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윤모 |
[정의]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 운동.
[개설]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광복까지 끊임없는 항일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펼쳐졌다. 광명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주로 3·1운동과 야학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3·1만세 운동]
독립에 대한 열망은 광명 지역에서도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7일, 소하리에 거주하는 이정석은 노온사리에 있는 일본 순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참가 인원은 확인할 수 없지만, 광명 지역에서 벌어진 최초의 시위였다. 그러나 이정석은 3월 28일 아침 치안법 위반으로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본격적인 만세 시위운동은 체포된 이정석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3월 28일,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李宗遠)과 최호천(崔浩天), 윤의병(尹宜炳), 이순만(李順萬) 등이 노온사리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정석을 구출하자는 모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밤 10시경, 서면을 중심으로 모인 200여 명의 주민들은 최호천과 윤의병·이순만 등을 따라 순사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들은 곤봉과 돌로 준비하고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 경내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주재소 게시판을 부수고 벽을 허무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보통학교 뒤편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때 이정석은 이미 시흥 본서로 이송되었으므로 최호천 및 윤의병 등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광명 지역 3·1운동의 한 장을 장식하였다. 당시 시위를 주동한 윤의병과 최호천 등은 배재고등학교 학생들로서, 이종원·유지호·최정선·김인환·최주환 등 광명 지역 농민들과 합세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은 이후 모두 체포되어 벌금을 물거나 옥고를 치렀다.
[계몽 운동]
3·1운동 이후 광명 지역 항일운동은 주로 지식인 청년들이 주도하는 야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3·1운동이 좌절되면서 광명 지역에서의 항일운동 방향은 계몽 운동과 신문명 학습이라는 차원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1920년대 경기 지역에서는 20개 군에서 178개가 넘는 청년 단체가 결성되었다. 광명 지역이 속해 있는 시흥군의 경우에는 13개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들 단체 대부분은 서울과 인접한 영등포나 인구가 보다 밀집한 안양 지역에서 주로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대중 조직이 용이한 이유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광명 지역에서의 청년 운동은 주로 야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1927년 11월부터 소하리에 설립된 야학은,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윤의병을 비롯해 이순구·이병대·이범구 등 여러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이들은 노동야학회를 결성하고 주로 무학자를 대상으로 강습을 했는데, 농촌 지역 특성상 문명 퇴치 운동의 성격을 나타냈다.
소하리 야학은 중간에 여러 사정으로 중지되었다가 계속되기를 반복했으나, 최소한 1932년까지 지속되어 큰 성과를 이루었다. 1932년 8월 23일과 9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5세 미만의 아동들도 주경야독으로 야학에 참여하여 절반 정도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많을 때는 남자 211명, 여자 18명이나 되는 인원이 야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광명 지역 야학 운동은 3·1운동 주역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농촌 계몽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