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B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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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우리나라 어디서든 안택고사를 지내지 않은 곳은 없지만, 특히 경기도는 지금도 안택고사가 잘 유지되고 있는 지역 중 하나다. 필자가 연구를 위해 조사를 다니던 10여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가을고사를 지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속이었으나 2009년 현재 많은 가정에서 고사를 지내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소중한 우리의 전통 문화인데 잊혀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과거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보다 분명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 연구에서 시간적인 대상은 찾고자 하는 본질이 아니다. 통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하다. 부분으로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한 가신 신앙은 왜 중요한가. 가신 신앙을 조사하며 그 자체만을 본다면 그것은 비판 받을 만하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을 쳐다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마을지에서 가신 신앙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문화에서 가신 신앙은 그 지역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아방리[능말]에서는 주로 음력 10월에 지내는 가을고사만 남아 있다. 토박이 주민 중에서 다섯 집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재숙 씨 댁이나 양승만 씨 댁, 강후군 씨 댁에서는 옛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아방리[능말]에는 기독교인이 별로 없다. 토박이 주민들의 경우 유교에 대한 의식이 강하고 우리 전통 신앙을 지켜 왔기에 마을에 교회가 들어섰으나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근래에도 교회가 하나 생겼으나 신도들은 주로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재숙 씨네 가을고사 이야기]
이재숙[1932년생] 씨를 통해서 아방리[능말] 마을의 안택고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마을 주민들은 ‘안택고사’라는 말은 잘 모른다. 주로 가을에 하는 고사라고 하여 ‘가을고사’라고 부른다. 요즘이야 고사를 지낸다고 하면 뭐 별로 신이 날 일이 없다. 그런데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떡 찐다’고 하면 그날은 축제와 같았다. 질시루[유약을 바르지 않은 시루]에서 김이 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대문 밖에서 서성인다. “엄마 아직 덜 됐어?” 하고 목청껏 소리도 질러 본다. 그렇게 먹는 떡이 얼마나 맛있는지.
만약 그 해 가을고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면 아이들 등살에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중 10월은 가장 풍성한 달이다. 추수를 끝내고 집 안에 쌀이 넉넉하게 있기 때문이다. 봄철이 되면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를 곯지만,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고 해도 이때만은 떡을 한다. 이웃집에도 한 접시씩 돌린다. 그것이 우리네 인심이다. 그 시절[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사탕, 떡, 고기면 최고였다.
이재숙 씨네는 열다섯 식구가 살 때는 쌀 한 말에 팥 두 되를 넣고 고사떡을 쪘다. 요즘에는 쌀 서너 되에 팥 한 되로 고사떡을 찐다. 1990년대 이전에는 가까운 이웃에 다 돌렸으나 지금은 친한 몇 집에만 돌린다.
방앗간이 없던 시절에는 집에서 방아나 절구로 떡쌀을 빻았으나 방앗간이 생긴 후로는 방앗간에서 빻아 온다. 질시루에 쌀가루를 한 켜 깔고 그 위에 팥가루를 깔고 또 그 위에 쌀가루를 올리고 또 팥가루를 올린다. 이렇게 서너 켜를 깔고 솥 위에 올린 후 떡을 찐다. 이때 쌀가루 한 주먹을 질시루 상단 한쪽에 따로 찌는데, 이렇게 찐 백설기는 칠성님께 바친다. 칠성님께 비는 것은 자손들을 위해서이다. 이때는 ‘산시루’도 따로 찐다. 산시루는 구름산 산신님께 바치는 것인데, 산시루에는 팥을 빻지 않고 통팥을 그대로 넣어서 찐다.
떡이 다 되면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시간에 조용히 고사를 지낸다. 우선 질시루를 대청의 성주 앞에 놓고 칠성시루는 장독대에 올린다. 질시루에는 북어, 돼지고기, 막걸리도 올려놓는다. 질시루 앞에서 비손을 하고 10여 분 그곳에 두었다가 접시에 조금씩 떡을 담는다. 그러고는 방, 부엌, 대문 등 집 안 곳곳에 떡을 가져다 놓는다. 장독대 옆에는 터주가리가 있는데, 그곳에도 떡을 한 접시 가져다 놓는다. 산시루는 마루 끝에 놓고 구름산을 보고 비손한다.
이재숙 씨 댁은 1981년까지 초가집이었으나 그 해 집을 새로 지었다. 초가집에 살 때는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도 해 놓고, 광에는 대감항아리도 모셨다. 성주는 특별히 신체를 해 놓지 않았으나 대청 대들보를 성주로 모셨다. 터주가리는 항아리에 집에서 짠 베를 넣고 그 위에 짚주저리를 씌웠다. 몇 해 동안은 간단히 나무만 꽂아 놓고 그 위에 짚주저리만 씌워 놓은 적도 있었다. 대감항아리에는 농사를 지은 후 가장 먼저 찧은 쌀을 넣는다. 매년 이렇게 하여 새로운 쌀을 교체할 때면 이전의 쌀을 꺼내어 먹는다.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다들 이렇게 가신을 모셔 두었으나 집을 새로 짓고는 대부분 없앴다.
가신 신앙에는 집을 소우주로 보는 우리 민중들의 세계관과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 남녀 간의 조화를 중요시 여기는 무속적 사유와 동양 사상이 결합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 그 지역 문화의 성격도 규명될 수 있다. 그래서 가신 신앙은 소중한 우리의 전통 문화이다. 이재숙 씨와 같은 노년층이 작고한 후 그 며느리들이 이러한 풍속을 계속해서 이어 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방리[능말]에 대한 기록은 후세에도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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