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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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공식명칭 | Contemporary Tim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범 |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 초 정치적 혼란 속에 경산 지역 내에서는 좌우익 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비교적 안전지대로 유지되었으나,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수백 명의 경산군민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까지 경산은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인접한 대구가 급속하게 성장함에 따라 경산은 신흥위성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1995년 경산군이 경산시에 통합되었으며, 현재는 교육·문화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해방과 6·25전쟁]
일제 강점기의 경산은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했고, 강제징용 등 수탈 정책의 피해를 적잖이 입으면서도 대왕산 죽창의거와 같은 치열한 저항으로 맞섰던 곳이다. 그런 의기(義氣)와 정신으로 경산인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의 새나라 만들기에도 합심하여 나섰다.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유명 항일목사(抗日牧師)이던 김용규(金容圭)가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훗날 김용규는 뒤에 경산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1946년 들어서부터 좌우대립 격화라는 정세 속에서 좌익세의 입김이 점점 강해지는 대구 쪽의 정치적 풍향이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 배경에서 경산군에도 인민위원회가 세워져 신학근(申學根)이 위원장을 맡았고, 조희진 등 여러 사람이 조력하였다. 대구 10월 사건 때는 하양면과 자인면 등의 몇몇 면들이 강도 높은 폭력사태가 일어났던 영천군과 맥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항쟁 가담자의 일부는 경찰의 추적에 쫓기다 입산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체포되어 포고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 이로 인해 경산 지역의 좌익 세력과 일반 군민들은 1949년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반강제로 가입하였고, 급기야 6·25전쟁 발발 직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수백 명의 경산군민 보도연맹원이 경찰과 군인에 의해 무더기로 죽음을 당했다.
6·25전쟁 초기의 전세가 아군에 몹시 불리해져 있을 때도 경산은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 남쪽에 있는데다 미군 예비대가 일시 주둔해있기도 하여 비교적 안전지대로 유지되었다. 경산 인근의 신녕과 영천이 북한군에 일시 점령되고 국군의 반격전으로 치열한 전투 현장도 되었음에 비추어보면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영천지구 전투에서 국군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면서 북한군을 격퇴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 후로도 경산은 내내 전화(戰火)의 직접적 피해와는 거리가 먼 지역으로 남았다. 다만 한동안은 청도·영천·경주군과 더불어 ‘공비소탕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비상계엄지구로 되어 있다가 1952년 3월에 해제되었다.
[1970년대까지 경산 지역의 변천]
6·25전쟁 후 경산 지역에서도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 진행되었다. 1956년 7월 경산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에는 안심면·하양면이 같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0년대까지 경산군은 전형적인 농촌지대였다. 금호평야·남천분지·관란천분지 중심의 비옥한 농토에서 쌀·보리가 수확되며, 사과와 대추·포도·참외·복숭아 등의 과일과 각종 채소가 주요 산물이었다.
1970년부터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우선은 마을의 생활 환경 개선과 농가소득 증대로 목표가 두어졌다. 경산에서는 새마을운동 개시 이전부터 ‘새마을 만들기’ 사업을 전개하였다. 1966년부터 가옥과 도로를 대폭 개선하여 고산면 사월동과 매호동을 경북도내 최초의 ‘새마을’로 만들었다. 그 후 소득증대 사업에 역점을 두었고, 1970년대 들어서는 도시 새마을운동과 직장 새마을운동으로 전환시켜 적지 않은 성과를 내면서 의식 구조의 개혁도 꾀하였다.
[1980년대 이후의 행정구역 변화와 경산시의 재탄생]
1981년 7월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될 때 안심읍과 고산면이 편입되어가면서 경산군의 행정구역은 2읍 7면 1출장소로 축소되었다. 1986년에는 용성면 육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89년 1월 경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의 행정구역은 1읍 7면으로 더 축소 조정되었다. 시-군 분리 이후로 경산군은 전원도시·학원도시의 면모가 강해지고 경산시는 대구로의 구심력이 작용하는 신흥 위성도시의 성격을 키워갔다.
전면적인 지방자치제 실시를 앞두고 1995년에 단행된 전국적 행정구역 개편 때 경산시가 경산군을 흡수 통합하여 면적의 확장과 더불어 도농복합도시로 재탄생하였다. 그 후 1997년 11월에 진량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2004년에는 서부동이 1동과 2동으로 나뉘었다. 이후로 경산시는 2개 읍[하양·진량], 6개 면[와촌·자인·용성·남산·압량·남천], 7개 행정동[중앙·동부·서부1·서부2·남부·북부·중방]과 28개의 법정동을 거느리며 적어도 소도시는 넘는 규모로 발돋움해왔다. 2020년 1월에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는 3읍 5면 7동의 행정구역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인구 변동과 경산의 성장]
경산의 인구는 경산군 시절, 시·군 분리 이후, 통합시 창설 이후의 세 시기별로 기복이 있었다. 경산군 시절에는 경산읍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1980년에 약 19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81년에 안심읍과 고산면의 6만 명이 대구로 편입하면서 감소하였다. 게다가 1989년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하면서 떨어져나가게 되면서 경산군의 인구는 9만 명으로 더 줄어들고 이후 격감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에 경산시는 1990년 6만 명을 넘어서면서 계속 증가하였다. 1995년 두 시·군의 통합으로 절대 인구수가 그만큼 더 늘어난 셈이 되고 이후 지속적인 증가 추세도 보여, 2000년에 약 21만 6,400명에 이르렀다. 이는 도농통합에 의한 일시적 증가 이후 감소 추세가 나타나는 다른 지자체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2020년 8월 31일 현재 총면적 411.7㎢인 경산시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11만 7,861 가구에 27만 2,751명[외국인 1만 451명 포함]이다. 남자가 13만 8,465명, 여자가 13만 4,286명으로, 남자가 3% 많다. 1980~90년대에는 경공업의 발달로 여초(女超) 현상을 보였는데, 2000년대 이후로는 기계·금속공업의 정착과 더불어 남초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가구당 인원은 1980년의 4.8명에서 현재는 2.3명으로, 부부가족과 독신자 비율이 그만큼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15세 이상 65세 미만의 경제활동 가능인구 비율이 71.1%에 달하여, 다른 시·도나 경상북도 전체에 비해 젊고 역동적이며 성장일로의 도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산업구조 변화와 교육·문화도시로의 이행]
경산시의 지속적인 인구증가와 도시성장은 산업구조의 변화와 교육도시로의 변모가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1969년 제일모직 경산공장이 들어선 이래 2·3차 산업의 비중이 갈수록 증가했고, 그에 비례하여 주택과 공장 부지의 증대로 농경지는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금호강의 풍부한 용수, 편리한 교통, 넓은 용지 확보 등의 입지조건으로 제조업체가 점차 들어서면서 진량공업단지가 조성되었고, 1984년 중방동에 조성이 완료된 공업단지에는 주로 섬유공장들이 들어섰다. 현재는 경산·진량·자인의 3개 일반산업단지에 2천 개 이상의 기업체가 입주하여 1만 7천 명 가량의 종사자가 근무하고 있다. 경산시의 전체 사업체 수에서는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지만, 자동차·트레일러, 고무·플라스틱, 전기장비, 섬유, 금속가공 등의 제조업과 교육서비스업도 높은 비중을 점하고 있다. 종사자 수에서는 제조업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이와 더불어 경북테크노파크와 한국섬유기계연구소를 비롯하여 한국한방산업진흥원, 경북IT융합산업기술원, 자동차용 임베디드센터, 중소기업진흥공단 연수원 등의 기업지원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근래 들어 하양읍에 조성된 지식산업지구가 대구·경북 지식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산학협력과 산업융합을 통한 첨단산업도시로의 도약이 기대된다. 그뿐 아니라, 생산량에서 전국 1위인 묘목과 대추, 3위인 복숭아, 6위인 포도 등의 종묘 산업을 지역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종묘산업 특구가 하양읍과 진량읍 일원에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경산시는 이름난 교육·학원도시이기도 하다. 1968년 영남대학교가 이전해온 것을 시작으로 1980년 대구대학교, 1984년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외 경산대학[현 대구한의대학교], 경북실업전문대학, 대구신학대학[현 대신대학교]이, 뒤이어 경북산업대학[현 경일대학교]과 경동전문대학[현 호산대학교], 영남신학대학, 대경전문대학[현 대경대학교]이 이전해오거나 신설되었다. 대학이 들어서면서 대학촌 중심의 새 상권이 형성되고 청년문화의 유입만 아니라 정치 성향의 변화까지 촉진되어 경산의 면모와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2018년 현재 경산시 관내 각급학교의 수는 유치원 64개, 초등학교 31개, 중학교 14개, 고등학교 12개에 더하여 전문대학 3개와 4년제 대학교 7개이다. 문화시설로는 시립도서관과 2개의 분관, 시립박물관과 대학박물관 등 5개소의 박물관이 있고, 공연장도 시민회관과 국악원, 문화원의 3개소가 있다. 1996년부터 ‘경산시민의 날’ 축제가 매년 열리는데, 문화행사와 체육대회를 번갈아 개최한다. 문화도시의 면모도 새롭게 갖추어가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발전의 전망과 그늘]
경산시는 대구광역시와 연접해 있으면서 철도와 도로망이 발달하여 시내와 하양읍 등은 이미 대구의 통근권에 속한다. 경부선 철도가 시의 서남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삼성역과 경산역을 통해 대구·부산·서울 등지로 연결된다. 경산역에는 고속열차[KTX]도 정차한다. 대구선과 경부고속도로 또한 시의 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면서 대구·영천·경주로 연결된다. 대구~포항, 대구~부산 간의 새 고속도로도 뚫렸으며, 2개의 국도[4호 및 25호]와 4개의 지방도가 시의 중부와 북부를 관통하므로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사이에는 시내버스가 빈번히 왕래하며 대구지하철 2호선이 영남대역까지 연장 운행되고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도 안심역에서 하양역까지 8.89㎞를 연장하는 복선 부설이 진행 중이고 2022년 개통 예정이다. 그러면 현재 통근·통학 등으로 5~6만 명에 달하는 1일 유동인구가 더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경산은 대구광역시의 일상생활권에 속하는 근교 주변지역이면서 산업과 교육·연구 및 주거 기능의 결합·집적을 선도적으로 이루어냄에 의해 괄목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구광역시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와 낮은 정주성(定住性), 모호한 지역 정체성 등은 약점이 되고 있다. 게다가 ‘지방분권·지역중시’ 구호의 이면에 서울-수도권 중심의 사고가 아직 팽배해 있어 그만큼 ‘지방대학 소멸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기에 지역 발전의 한계에 봉착할 위험도 상존한다. 아울러 공업단지 확장과 인구증가, 교통망 확대 등이 낳는 환경문제, 주택문제, 범죄 빈발 등의 여러 문제에도 유의하여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