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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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郡北 市場 萬歲 運動 |
영어공식명칭 | Gunbuk Marcket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군북 장날 만세 운동,군북 장날 의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승 |
[정의]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규모와 만세 운동 횟수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월 9일 칠북면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이었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이어서 3월 23일과 4월 3일·8일·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4일간 연속적으로 모두 11회,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낳았으며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해 또한 전국 1위였다. 이를 통해 함안 지역의 3·1 운동이 매우 격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고종(高宗) 황제가 승하(昇遐)하자 함안의 많은 지사들 중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박건병(朴鍵秉)·강기수(姜琪秀)·한관열(韓灌烈) 등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월 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이들은 3월 5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한 그날 밤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서 조상규(趙相圭)·조경식(趙璟植)·조주규(趙周奎)·조석규(趙碩奎)·조형규(趙炯奎)·조용규(趙鏞奎) 등이 군북에서도 만세 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 결과 군북면 오곡리·소포리·하림리·모로리·중암리·사도리, 법수면 강주리 등의 여러 지사들에게 거사 계획이 전달되면서 각 리·동 책임자가 선정되었다. 이후 3월 10일 군북 장날 백이산의 서산 서당에서 각 책임자들이 모여 3월 20일 정오 군북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경과]
3월 20일 군북 장날의 거사 계획이 수립되자 각 방면의 지사들이 역할 분담에 따라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장날 사용될 독립 선언서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 선언서의 내용이 난해하고 분량 또한 많았기 때문에 군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작하여 서산 서당과 여항산(艅航山)의 원효암(元曉庵)에서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서산 서당에서는 독립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신창 학교 등사기로 등사하고, 원효암에서는 서산 서당에서 등사한 태극기의 태극에 붉은 물감을 칠하고 원효암 주변의 산죽(山竹)으로 깃대를 만들었다. 3월 18일 모든 준비를 마친 지사들은 서산 서당과 원효암에서 철수한 뒤 이튿날 3월 19일 함안읍 장날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함안읍 장날 만세 운동은 당일 함안군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신창 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창 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지도하였던 지도부와 사전 협의 없이 일어난 만세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의 규모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예상외로 많은 장꾼과 시위 군중이 모여들어 거사 장소를 군북천(郡北川)으로 옮겨 오후 1시 조상규 의 독립 선언서 낭독과 조용규의 대한 독립 만세 선창을 시작으로 3,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하여 시작되었다. 시위 군중은 우체국과 면사무소를 거쳐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전날 있었던 함안읍 장날 만세 운동에서 체포된 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마침내 주재소를 습격하게 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조용규를 비롯해 20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8명이 중상을 입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결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지도부의 치밀한 사전 준비와 5,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함으로써 일본 경찰들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그 결과 시위 군중에 놀란 일본 경찰들은 군중들을 향해 발포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일 40여 명의 많은 사상자를 낳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함안읍 장날 만세 운동과 거의 동시에 계획되어 전개되었고 40여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격렬하였다.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이후 1932년 2월 28일 군북 공립 보통학교 학생 280여 명이 참가한 학생 운동, 같은 해 일어난 군북 농민 조합 사건, 이어서 1935년 동창(東昌) 야학교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군북 지역 항일 운동의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