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56 |
---|---|
한자 | 國民 保導 聯盟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6·25 전쟁 이후 함안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원들을 소집한 뒤 학살한 사건.
[개설]
국민 보도 연맹(國民保導聯盟)은 좌익 활동의 경력이 있는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단체로 1949년 6월 5일에 결성되었다. 함안에서는 1949년 12월 12일에 국민 보도 연맹 함안군 지부 결성 선포 대회를 개최하고 결성되었다. 국민 보도 연맹원들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각 지역에서 예비 소집되어 집단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적 배경]
국민 보도 연맹은 당시 사상 검사였던 오제도(吳制道)가 제안하여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및 사회 지도자들의 검토와 동의를 통해 1949년 6월 5일에 만들어졌다. 국민 보도 연맹의 결성 목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남로당에 대한 탄압을 통해 속출하고 있는 탈당 및 전향자들을 계몽 지도하여 다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 갱생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국민 보도 연맹은 좌익 전향자들의 단체임을 표방하였지만 단체의 조직과 운영은 철저히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주도하였다.
국민 보도 연맹의 가입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하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 중 전향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좌익과 관련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일차적인 가입 대상인 자수자의 경우에는 가입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 대체로 남로당 및 남로당 산하 단체의 회원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역 지부의 가입 규정을 보면 민족진영 사회단체에서 활동한 사람, 미소 공동 위원회의 행사에 참여한 사람,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 민주주의 민족 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산하 사회단체에 금품 조달이나 협력을 한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좌익 사상을 가지거나 구체적인 활동을 한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국민 보도 연맹의 가입자들 대부분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 사이 예비 소집되어 군, 경찰, 방첩대, 우익 청년 단체 등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과]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마산 위수 사령관 이유성과 진해 군항 사령관 김성삼은 1950년 7월 8일에 마산·고성·창원·통영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송요찬 헌병 사령관은 1950년 7월 12일에 “필요에 따라 법원의 허가 없이 국민 보도 연맹원들을 예방 구금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이유성 마산 위수 사령관은 1950년 7월 15일에 거제·마산·통영·창원 일부 지역의 국민 보도 연맹원을 전원 예방 구금하였다. 1950년 7월 24일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수동, 대천 마을의 보도 연맹원들을 소집한 뒤 함안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였고, 이후 트럭에 실어 마산 방향으로 갔다. 1950년 7월부터 9월 하순까지 경상남도의 전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집단 총살이나 수장 등이 행해졌다.
[결과]
전갑생의 연구에 의하면 1950년 7월경 함안에서 희생된 국민 보도 연맹원은 200여 명이다[국민 보도 연맹 이외의 민간인 학살을 포함하면 그 수는 크게 증가한다].
[의의와 평가]
1990년대에 들어 희생자 유가족 단체와 시민 단체 등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으며 진실 화해 위원회 등 과거사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어 이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 조사하였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은 정부를 대표하여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유감과 사과를 표명하였으나 아직 이념 간의 갈등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