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19 |
---|---|
한자 | 孫鍾一 |
영어공식명칭 | Son Jongi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손종일(孫鍾一)[1872~1945]은 1872년 12월 6일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들 손양원(孫良源), 손자 손동인(孫東印)과 손동신(孫東信)이 있다. 칠원 교회를 설립하고 장로로 활동하며 민족의 힘을 길러야만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 알렸다. 기독교의 연락망을 통해 3·1 독립 선언 시위 운동을 통보 받고 박순익(朴順益)·엄주신(嚴柱信) 등과 협의하면서 황대수, 박경천, 윤사문, 윤형규, 이원식, 주영호(周泳鎬), 황영환(黃英煥) 등과 3월 23일 칠원 장날에 독립 시위 운동을 하기로 계획하여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손종일은 1919년 3월 23일 오후 4시경 칠원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 군중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위협하고 시위를 저지하면서 신영수·황영환이 체포되고 신영수가 부상을 당하자, 손종일은 군북 시장 만세 운동처럼 많은 사상자의 속출을 걱정하며 시위 군중을 자제시켰다. 하지만 밤 9시가 되어서도 손종일은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낮에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칠원 경찰 주재소 앞에 모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4월 3일 오후 3시경 칠원 장날을 이용하여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를 계획하였다.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에 1,3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고, 손종일은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오후 5시경에 800여 명의 군중이 칠원 경찰 주재소에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김상률, 정영보, 박경천, 윤형규 등이 체포되었다. 손종일은 1919년 5월 20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1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는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에서 최고형에 해당된다. 손종일은 형기를 마치고 만주 하얼빈으로 망명하여 독립과 선교를 위해 활동하다가 1945년 4월 11일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