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분쟁의 거점성지, 왜구 방어를 위한 중심성지인 사근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13
한자 三國分爭-據點城址-倭寇防禦-中心城址-沙斤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삼국 시대/백제,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재현

[정의]

전략적 요충지인 경상남도 함양의 사근산성에서 발생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 왜구의 침탈 등에 대한 역사.

[함양과 산성]

“함양 작은 현에 많은 산이 깊다.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는구나.” 이는 목은 이색의 시에 담긴 함양이다. 경상남도 함양은 험한 산지로 둘러싸인 산간 분지다. 서편으로는 산이 높고 동편으로는 지대가 낮은 지역으로 동서가 25㎞, 남북이 50㎞인 산간 지대이다. 또한 소백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어 사방이 험한 산지로 둘러싸인 산간 분지를 이룬다. 크게 보자면 함양은 경상남도 서북부에 있다. 북으로 남덕유산, 남으로 지리산 그리고 그 중간에 백운산이 있어 소백산맥의 산줄기가 호남 지방과 경계를 이룬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과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위천, 전북의 운봉과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엄천은 함양군의 동남쪽에서 합쳐져 남강으로 흐른다.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복속시키면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신라의 영역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함양 지역은 신라와 백제 간의 전쟁이 빈번하였다. 산성이 많은 것도 이러한 과거를 보여주는 근거임에 틀림없다. 아직도 함양 지역엔 많은 산성이 남아 있다.

경상과 전라의 경계, 팔령산성(八嶺山城)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선 “팔량현은 군의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지다. 고개 위에 신라 때의 옛 보루[古壘]가 있다”고 하였다. 팔령산성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있는 성이다. 또한 지리산의 줄기인 덕유산백운산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산림이 울창한 중요 요새지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함양 사근산성을 함락한 후 운봉으로 진격하는 것을 이곳의 산세를 이용하여 섬멸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산성이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요새지, 황석산성(黃石山城)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변방의 요새지에 축조된 삼국 시대의 고성으로,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요새이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유서 깊은 성터이다. 처절하였던 당시 전쟁을 떠올릴 수 있는 피바위가 남아 있다.

마안산성(馬鞍山城)

마안산[해발 508m]의 정상부에 가까운 9부 능선 위에 있다. 남으로 약 6㎞ 지점에 사근산성(沙斤山城)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형승조에는 “안점산(鞍岾山)은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고성(古城)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산성의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방지성(芳地城)

방지성은 백제의 신라 약탈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쌀을 비축하였다고 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 불리기도 하며, ‘금당성(金唐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와 백제의 각축지, 함양]

562년 가야 지역을 점령한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7세기로 접어들면서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을 통하여 지리산 동쪽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때문에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전쟁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왕 3년[602]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삼국사기』 권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무왕 6년[605] 가을 8월에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권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무왕 25년[624]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速含)·앵잠(櫻岑)·기잠(歧岑)·봉잠(烽岑)·기현(旗縣)·혈책(穴柵) 등 여섯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권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진평왕 46년[624] 겨울 10월에 백제(百濟)의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級湌) 눌최(訥催)는 봉잠[성]·앵잠[성]·기현[성]의 세 성의 군사와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삼국사기』권제5 신라본기 제4 진평왕)

아막산성은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아영공원에 있는 석성으로, 신라와 백제의 쟁탈전이 격렬하였던 장소이다. 백제가 아막산성을 공격한 것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아막성을 빼앗아, 남원-함양선을 돌파하여 옛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시도였다. 즉 백제 군대는 운봉에서 함양과 산청을 거쳐 진주 방면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신라가 공격한 동쪽 변경지역은 아막성에서 남원을 거쳐 임실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는 백제가 전라북도 동부 지역에서 신라에 밀리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신라는 경상남도 함양에서 팔령치를 넘은 다음 운봉고원을 거쳐 남원과 임실 등의 전라북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백제는 각 산성을 축조하여 신라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무왕의 가야 지역 진출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신라군의 반격에 밀렸기 때문에 남원과 임실 및 장수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624년 무왕이 공격한 속함성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앵잠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일대이다. 기잠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혈책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으로 추정된다. 백제 무왕은 아막성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굳건한 방비로 인해, 운봉고원을 넘어 옛 가야 지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 때문에 전라북도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경상남도 함양으로 진출한 후 주변 지역을 장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6성 중 속함·기잠·혈책이 먼저 함락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백제 군대는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함양-합천, 삼가-산청군 단성 지역을 장악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강의 본류를 따라 산청에서 진주로 통하는 교통로 위에 있는 봉잠 등 3성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와 사근산성]

사근산성은 왜구 침략을 방어하던 요충지였다. 그러나 1380년[우왕 6]에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에게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사근산성에서 패하였다. 이때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두 장수와 사졸 500여 명이 이곳에서 전사하여 냇물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왜구가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원수(元帥)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이 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사졸들 가운데 죽은 자가 500여 인이나 되었다. 왜구가 마침내 함양(咸陽)을 도륙하였다.(『고려사절요』 권31 신우2 우왕 6년[1380] 8월)

함양을 도륙한 왜구는 단숨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거느린 군대에 의해 남원 인월역에서 격파되었다.

●경신년[1380년]에 왜구가 진포(鎭浦)로부터 양광도(楊廣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지역을 횡행하면서 군·읍들을 분탕질하고 사녀들을 마구 죽이고 약탈하여 삼도가 시끌시끌하였으며, 원수(元帥) 배언(裴彦)과 박수경(朴修敬) 등은 모두 전투에서 져서 전사하였다. 나라에서 이를 우려하여 경[태조 이성계]과 아홉 명의 원수를 보내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주저하여 진격하지 않았으나 경만은 분연히 그 휘하를 통솔하여 인월역(引月驛)에서 격전을 벌여 적군을 남김없이 포획하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안정되었다. [『고려사』권137 열전 권제50 창왕 1년(1380) 9월조]

전쟁의 참혹한 상황은 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운봉산하추풍조(雲峰山下秋風早)[운봉산 밑에는 가을바람이 이르고]

일염천한목엽고(日淡天寒木葉稿)[햇살은 얇고 하늘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시시도이패아군(是時島夷敗我軍)[이때에 우리 군사가 섬 오랑캐에게 패하여]

혈찬함양원상초(血濺咸陽原上草)[피를 함양의 언덕 풀에 뿌렸네]

양부원수진전망(兩府元帥陣前亡)[양부의 원수가 진(陣) 앞에서 죽었으니]

사졸미구난자보(士卒微軀難自保)[사졸들의 미미한 몸 보전키 어려웠어라]

위는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였던 이첨(李詹)의 시로, 왜구에게 패배하였던 당시의 참혹한 함양 지역을 표현하고 있다.

함양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흉상으로 남아 있는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도 그때의 슬픔을 시로 남겼다. 내용 속의 장사군은 당시 함양 감무로 있었던 장군철(張群哲)을 말한다.

사근성반기음운(沙斤城畔起陰雲)[사근산성가에 검은 구름이 일어나니]

곤령야읍우분분(坤靈夜泣雨紛紛)[땅의 혼령은 밤에 울고 비는 분분하도다]

경신만귀추추곡(庚申萬鬼啾啾哭)[경신년의 많은 귀신 두런두런 우나니]

사한당시장사군(似恨當時張使君)[그때의 장사군(張使君) 한인 듯하네]

이 외에도 함양 지역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호남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다음의 기록은 왜구의 침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구가 또한 산음(山陰)·진주(晉州)·사주(泗州)·함양(咸陽)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사절요』 권31 신우2 우왕 5년[1379] 9월)

●왜구가 함양군(咸陽郡)을 노략질하였다. 도순문사(都巡問使) 윤가관(尹可觀), 진주목사(晉州牧使) 박자안(朴子安)이 맞서 싸워 18명의 목을 베었다. (『고려사절요』 권32 신우3 우왕 10년[1384] 11월)

●왜구가 함양(咸陽)에서부터 운봉(雲峰)의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南原)에 이르렀다. 도지휘사(都指揮使) 정지(鄭地)가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운해(崔雲海) …등을 독려하여 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는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밤에 도망쳤는데 정지가 군사들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자 적이 배에 올랐다. [『고려사절요』 권33 신우4 우왕 14년(1388) 8월]

[사근역과 사근산성]

1) 사근역의 변천

고려 시대 1018년(현종 9), 전국을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체계로 확대 재편하면서 사근역이 등장한다. 사근역은 전주에서 진안-함양-진주-거제까지 이어지는 역도에 설치된 산남도(山南道) 28개 역 중의 하나로, 1,000년이나 유지되었다. 2018년은 사근역이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사근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내동마을이다. 이를 ‘역말’이라고도 한다.

사근역이 삼국 시대부터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유추된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에 있어 전쟁이 잦았고, 지형상 병목처럼 생겨 사근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느 곳으로도 진출하기 어려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경우 사근역은 경상도 지역 10개 역도 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16개 역을 거느린 사근도(沙斤道)로 나타난다. 사근도는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함양군의 사근역(沙斤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이다. 관할범위는 함양(咸陽)-산청(山淸)-단성(丹城)-진주(晋州)-하동(河東)-남해(南海), 산청-삼가(三嘉) 등으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역참으로 통하는 길]이다. 속하는 역은 진주의 유린(有麟, 三嘉)·안간(安澗)·정수(正守)·소남(小南, 召南), 안음의 임수(臨水), 함양의 제한(蹄閑), 산청의 정곡(正谷), 단성의 신안(新安)·벽계(碧溪), 의령의 신흥(新興), 하동의 횡포(橫浦)·마전(馬田)·율원(栗元, 栗原)·평사(平沙) 등 14개이다.

사근도 소속역은 모두 소로(小路, 小驛)에 속하는 역들이었다. 이 역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존재하였다. 사근도는 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사근산성은 사근도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근대 우정 제도가 들어오면서 1896년 폐지되었다.

2) 『사근도형지안(沙斤道形止案)』에 나타난 사근역의 모습

『사근도형지안』은 문경시 옛길박물관에서 발굴한 국내 유일의 역인 장부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형지안은 『사근도형지안』 외에 『김천도형지안』·『송라도형지안』·『자여도형지안』 4책뿐이다. 하지만 사근도형지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사근도형지안』은 국내 유일 현전하는 역의 호적대장으로서, 소속 역의 호구 편성과 가족 구성 그리고 결혼 양태 분석을 통한 신분 변화 등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이다. 역촌(驛村)[역이 있는 마을]의 사회사연구에도 사료가치가 크다.

형지안은 역참에 소속된 역리(驛吏)·역노비(驛奴婢)·일수(日守)·보인(保人)·솔거인 등의 역민(驛民)을 관리하기 위해 일반 군현의 호적대장과는 별도로 작성한 호적 장부이다. 3년 주기로 작성되었다. 이때 일수는 역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자이다.

옛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형지안은 1747년(영조 23)에 작성되었다. 『건륭십이년십월일사근도형지안(乾隆十二年十月日 沙斤道形止案)』으로 총 98장 196쪽에 5,715명의 사근도 역민의 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형지안에 기록된 사근도의 본역인 사근역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역리호구 165호, 역노비 96호, 일수 6호로 총 267호에 졸정[동거가족]이 987명이고, 보인 86명을 합하면 1,340명으로 가장 인원이 많다. 사근도 15개역 전체의 인정(人丁)[인부] , 즉 역민은 총 5,175명으로 그중에서 잡경을 제외한 역리호구 506호·역노 274호·역비73호·일수 59호로 총 912호이다. 동거 가족인 솔정은 4,004명이고 보인은 43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함양 지역은 조선의 10대로 중에서 제6로에 해당하며, 한양-통영을 잇는 교통로이다. 이 노선에 사근역이 설치되어 있다. 노선은 전주부-임실현-남원부-운봉현-함양군-산청현-단성현-진주목-사천현-고성현-통영이다.

3) 사근역 찰방,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사근도형지안을 작성한 사람은 이인상으로, 당시의 찰방이다. 찰방은 종6품 외관직이다.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책임자였다. 이덕무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실린 사근역선생안에 기록된 이인상은 1747년(영조 23) 7월에 찰방으로 왔다가 1749년 8월에 돌아갔다고 하였다. 문인들과 시·서·화를 교류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글씨는 전서에 능하였는데, 추사 김정희는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림도 경지에 이르렀는데 「설송도(雪松圖)」등의 작품이 전해진다.

4) 요충지, 사근산성(沙斤山城)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고대의 산성이다. 사근산성이 자리한 원평리 이전에 사근역이 있다. 산성은 해발 443m 연화산(蓮花山)의 능선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석성이다. 연화산은 산청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 국도 오른쪽에 있으며, 전라북도 남원시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방면과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이기도 하며, 동·남·서쪽 세 방향이 남강(南江)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새이다. 그 때문에 사근산성은 남해를 통해 호남으로 들어와, 곡창지대를 노략질하려던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1380년(우왕 6)에는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와 싸웠으나 함락되었다. 그 후 조선 성종 때 보완하여 쌓았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에서 처음 축성되었으며, 그 연도는 함양 지역이 신라에 의해 정복된 6세기 중후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년 된 사근역과 사근산성의 활용]

함양 지역은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영역 다툼을 벌였으며, 왜구는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노략질하기 위해 함양 지역을 침략하였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때문에 왜구침입을 막으려다 전사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추모제가 지난 2011년부터 매년 행해지고 있다.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일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반성이기도 하다.

사근산성은 함양 지역을 지키는 보루였으며, 지난 2008년부터 허물어진 산성의 일부를 복원하고 있다. 사근역은 서부 경상남도 교통로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올해는 사근역이 설치된 지 1,000년이 된 해이다. 우리는 사근산성사근역을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고, 함양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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