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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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綾州-趙光祖-挫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동면 천덕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덕진 |
[개설]
연산군 대 두 번의 사화로 타격을 받은 사림파의 정치 재개는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조광조(趙光祖)[1482~1519] 중용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조광조는 아버지의 임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 중인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써 왕도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개혁 정치를 주도하다 실패한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사상은 16세기 도학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나갔다.
[조광조의 정치 인생]
조광조는 1510년(중종 5)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에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임명되어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다. 그 해 가을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유교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여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대사헌 자리에 오른 1518년(중종 13) 4월에는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신진 사림을 요직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10월에 이른바 위훈삭제(僞勳削除)라 하여 「공신록(功臣錄)」을 전면 개정하여 중종반정 공신인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 공로가 없는데도 공신이 된 이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녹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국공신 가운데는 연산군의 사랑을 받은 신하들이 많았으므로 국왕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조광조를 따르는 관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공신 개정이 추진되고 있던 1519년 11월 15일에 훈구 대신 남정·심곤의 사주에 의해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국왕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를 전라도 능성(綾城)[인조 대에 능주(綾州)로 개칭]으로 유배 보냈다가 12월에 사사시켰고, 그를 따르던 인사들을 줄줄이 유배·파직·사형시켰다. 이후 이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일어났고,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맥을 기묘명현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이는 『기묘 당적(己卯黨籍)』에서 94인이던 기묘명현이 조선 후기에는 218명으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기묘사화로 유배]
임금은 한 밤중에 조광조를 잡아 옥에 가두게 하고, 다음날부터 심문을 가하여 국정을 문란시킨 수괴로 몰아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유배지는 능성으로 결정되었다. 길을 떠나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를 포함한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함께 남하하였다. 배소는 관아 옆 비봉산 북쪽 자락 남정리 외딴 집 관노 문후종(文厚從)의 집으로 정해졌다. 그의 집은 부엌 한 칸에 방 두 칸의 초라한 3칸 초가였다. 조광조는 적소(謫所)에 이르자, 집 북쪽에 둘러 있는 담을 두어 발 남짓만 헐고, 북쪽 들과 하늘이 보이도록 열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언제나 방의 남쪽에 앉아서 문을 열고 훤히 열린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대궐에 계신 임금의 안녕과 나라의 태평을 염원하였다. 말할 때마다 임금님과 나라를 걱정하기를, 마치 효자가 늙은 부모님을 걱정하듯 하였다.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정언, 수찬, 교리 등의 관직을 지낸 양팽손(梁彭孫)[1488~1545]도 기묘사화의 참화를 목격하고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조광조의 적소를 찾아갔다. 조광조는 “어떻게 해서 여기를 오십니까?”하며 문 밖으로 나왔다. 양팽손도 “그동안 먼 길에 얼마나 여독이 크셨습니까?” 하고 정중히 위로하며, 곤궁한 처지에 있을 지라도 형통함을 잃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자 조광조는 “우리 두 사람이 여기서 종유하게 된 것이 아마도 우연치가 않으니 서로 연마를 하여 본 뜻을 이룩하고 큰 허물이나 짓지 않도록 합시다.”고 말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유교 경전을 강마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어쩌다가 며칠만 서로 보지 못하면 곧잘 편지로 왕복하였다. 조광조가 의금부에 갇혀 있을 때, 양팽손은 상소를 올려 잘못 씌워진 누명을 벗기려고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런데 고향에서 다시 만났으니,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 동지들 중에서 가장 도학(道學)이 깊고, 가장 존경하는 벗을 고향에서 만나 경전을 강론할 수 있었으니 불행 중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조광조는 외롭고 곤궁한 중에 평소부터 더 없이 다정했던 반가운 벗을 만났으니 큰 위안이 되었다.
날마다 태연히 경전을 강론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동안 한 달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마침내 12월 20일, 겨울바람이 매섭게 비봉산 북쪽 자락에 불어오면서 새벽부터 세찬 눈보라가 쉬지 않고 몰아쳤다. 섣달 들어서 유달리 추운 날씨였다. 많은 눈으로 산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고, 강도 꽁꽁 얼어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덮여 물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보아도 누구 한 사람 드나들지 않았다.
낮이 되면서 눈보라가 잠깐 멈출 때 갑자기 사립문 밖에서 나는 “어명이오!” 하는 소리를 듣고 주인이 나가서 사립문을 열자,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유엄(柳淹)이 나졸들을 거느리고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죄인은 나와서 어명을 받으시오!”라고 하면서 방문 앞에 이르렀다. 조광조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지필묵을 내어 어명을 받는 소회를 썼다. 그리고 이어서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유엄이 “이제 그만 어명을 받으시오!” 하며 수명(受命)을 재촉하였다. 조광조는 거느리고 있던 사람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선영 묘지에 반장하여라. 관은 무겁고 두꺼운 것을 쓰지 말라. 먼 길에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고을 원님이 관동(官僮) 몇 사람을 보내어 심부름하게 하였는데, 이들에게도 각각 은근한 정을 표한 뒤, 주인을 불러 “내가 너의 집에 붙어 있으면서 끝내는 보답이 있을까 했더니,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을 보이고 또 너의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이어 조광조와 양팽손은 서로 손을 잡고 “우리 임금님께 충성을 다합시다.”, “얼마 가지 않아서 서로 만나지 않겠습니까?” 하는 말로 함께 마지막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어명을 받아 사약을 마셨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조광조는 피를 토하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화순에 남은 조광조의 자취]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염습(殮襲)한 후, 큰아들 양응기로 하여금 중조산(中條山)에 묻도록 하였고, 그 아래에 띳집을 짓고 문인들과 제자들에게 춘추로 향사하게 하였다. 그 후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조정에서는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 건립이 논의되었고, 1570년에 당시 능성 현령 조시중(趙時中)이 협찬하여 한천면 모산리 현재 위치에 건물을 지었고, 국가로부터 ‘죽수(竹樹)’란 사액을 받았다. 평소 조광조를 흠모해 오던 능성 출신 문홍헌(文弘獻)[1551~1593]이 서원 터를 제공하고 집의 노비를 주어 서원 건립과 수호에 충당하도록 하였으니, 당시 능주 사림의 조광조에 대한 흠모 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 후 1613년(광해군 5)에는 남평 현감 조위한과 영암 군수 조찬한 형제의 협조로 중수되었고, 1630년에 도내 유림과 조정의 김장생 등의 발의로 양팽손을 병향하였다.
한편 1667년(현종 8)에 당시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閔汝老)가 조광조가 유배 생활을 했던 곳에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를 세웠다. 이 비석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으며, 전서는 민유중이 썼다. 처음에는 비석만 세워졌고, 비각은 18세기 말 정조 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죽수 서원과 유허비는 조광조 유배지의 대표적 상징 유적으로 능주를 찾는 이의 발길을 잡았다. 수많은 선비들이 조광조 유지를 보기 위해 능주에 들렀고, 능주를 지나는 선비들은 어김없이 조광조 유지를 방문하여 대학자의 얼을 흠모하였다. 가령 1722년(경종 2)에 두타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강진 유배 중인 장인을 위문하기 위해 내려와 3개월 이상 전라도 일원을 여행하면서 능주에 들렀다. 그는 남평에서 동복으로 향하면서 능주에 들러 유허비 앞에 이르러 “이곳은 정암 조선생의 푸른 절개가 서린 곳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처럼 조광조는 비록 유배된 지 1개월여 만에 사사되어 짧은 기간을 능주에 머물렀으나, 그의 정치적, 사상적 지위나 인품을 흠모하던 능주 사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배 1개월 동안 학포 양팽손과 조광조는 서로 만나 학문과 시세의 흐름을 논하였고, 이러한 모습은 다음 세대의 능주 사림들에게 매우 큰 감명을 남겨 주었다. 실제 그가 죽은 후 양팽손에 의해 사우가 건립되어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던 점은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