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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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四通八達-都市益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시은 |
[정의]
철도와 도로를 통해 연결된 사통팔달 육로 교통의 중심지 익산.
[개설]
익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교통의 요지이다. 도시 인구 수와 면적 등 규모의 외연을 고려할 때 익산만큼 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된 도시는 드물다. 철도와 도로가 사통팔달로 이어져 교통 여건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사통팔달하는 육로 교통의 중심지]
호남평야에 안겨 있는 듯한 형세의 익산은 원래 ‘솜리’라는 이름으로 남일면에 속하였던 작은 마을이었다. 속에 안겨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솝리’라고 불렸다. 우리 옛말에 속[裡]을 ‘솝’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토박이말로 ‘솝말’[속마을]로 불리던 것이 ‘솝리[-里]’로 바뀌었다가, 한자 지명 ‘이리(裡里)’로 정착되었다. 지금의 익산시는 1995년 시군 통합 정책에 따라 익산군과 이리시가 합해져서 탄생하였다.
익산은 만경강을 따라 드넓게 형성된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동, 북, 서는 춘포면·팔봉면·황등면·오산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군 백구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익산에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공간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켜 지역 간의 접근성을 높였고, 통과 지역 내의 자연적 장애물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였음을 뜻한다.
익산의 도시권은 익산역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삼례, 성덕, 대야에 이르는 반경 약 12~15㎞, 남으로는 예촌, 모산, 백산, 만경까지 역시 반경 12~15㎞ 범위, 북으로는 웅포, 용안, 성당, 여산에 이르는 반경 20㎞ 이상에 해당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익산시는 사방이 평지이기 때문에 교통로의 제약이나 지형의 장애를 별로 받지 않는다. 그래서 어떠한 방향에서 접근하든지 동일한 시간이 소요된다.
높은 산이 없이 넓은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익산은 사방으로 물류가 유통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통팔달하는 육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농산물 교역 집산이 활발하였다. 특히 일본인이 들어와 농업 경영을 시작하던 일제 강점기에는 양곡 수탈을 목적으로 철도 부설과 도로 건설이 전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기반시설을 바탕으로 상공업 도시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열차와 버스의 운행 횟수와 이용객 수가 타 도시에 비하여 많은 것은 익산이 사방팔방으로 뻗은 철도와 도로망을 중심으로 한 교통 도시임을 보여 준다.
익산에는 호남선과 전라선 철도의 분기점에 위치하여 이리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계획되고 발달한 근대도시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영원한 식민지로 삼아 일본인들의 식량 기지로 만들려던 일제의 야욕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사그라진 광복의 그날 이후로, 익산은 미곡 수탈을 위해 계획된 근대도시가 아니라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 도시로서 유라시아 대륙철도 진출을 위한 거점 도시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익산의 혈관, 철도의 발전]
무엇보다 익산은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장항선] 등의 철도 요충지이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익산의 중앙을 관통하고, KTX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이 동서로 통과한다. 이처럼 익산은 목포를 잇는 호남선의 시작점이자, 수도권과 영남권을 연결할 수 있는 분기점이다. 전라선으로는 호남 동부 지역과 연결되며, 장항선으로는 군산 및 서해안권을 망라할 수 있다. 호남선과 군산선 철도는 일제가 부설한 국철(國鐵)이며, 전라선 철도는 전북철도주식회사가 전북경편철도(全北輕便鐵道)로 부설 면허를 받아 설치한 사철(私鐵)이다.
1910년 10월에 공사가 착수된 호남선 철도는 1914년 1월 11일에 개통되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합병된 1910년부터 일제는 철도 부설권을 독점하여 호남선 공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일제는 호남선 철도를 금마면을 경유해서 전주로 연결하려고 구상하였는데, 전주 유지들의 반대에 부딪혀 노선을 변경하면서 호남선 철도가 이리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이리가 군산항과 전주를 잇는 중계도시이자 호남평야를 기반으로 일제에 식량을 수급을 위한 근대농업 경영의 거점도시로 개발되었다.
1968년 호남 지역 개발과 수송력 증강을 목적으로 호남선 철도의 복선화 사업이 이루어졌고, 이후 2차 복선화 사업과 함께 대대적인 개수가 진행되었다.
군산선 철도는 당시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주동이 된 호남철도기성회(湖南鐵道期成會)라는 거류 민간단체의 적극적인 주장을 일제가 수용함으로써 부설되었으며, 이리역을 기점으로 군산항에 이르는 14.3㎞의 철길 구간이다. 호남철도기성회는 익산과 군산 간 도로 지반이 약하여 중량급 자재의 장거리 운송 보급에 애로가 있음에 따라 군산항을 통한 해운과 단거리 운송 이점을 제기하면서 군산지선 철도 공사를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군산선 철도는 1911년 6월에 착공하여 9개월 만인 1912년 3월 6일에 개통되었다. 일본인들이 서둘러서 개설한 군산선 철도는 곡창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양질의 미곡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운송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전라선 철도는 전북철도주식회사가 1914년 5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11월 12일에 완공한 6.2㎞의 협궤철도(狹軌鐵道)이다. 1927년 10월 1일에는 국철이 전북경편철도를 인수하여 광궤철도로 개축하였는데, 당시 철도 종사원 수는 112명이었다. 1929년 9월에 준공하면서 역사 및 부설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축하였다.
철도 부설과 함께 이리역을 중심으로 철도 관련 시설이 개발되었다. 1912년 3월 6일 군산선 철도의 개통일에 맞춰 이리역의 역무가 시작되었고, 이리역 남쪽[지금의 창인동 일대]에 관사촌과 이리철도병원이 들어섰다. 관사촌은 관사와 공동목욕탕, 하급 직원들의 공동기숙사 등이 모여 있어서 이리역과 인근 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살면서 출퇴근하였다고 한다. 이리역사는 이후 증개축이 이어지다가 1936년 7월 10일 모더니즘 양식으로 다시 신축되었다.
호남선 철도 부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구(舊) 익산읍내, 즉 금마(金馬)에 있던 우편소와 익산군청, 대장촌(大場村)에 있던 헌병분대가 이리로 이전하면서 이리는 익산 지방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또한 호남선과 전라선의 개통에 따라 관공서와 학교가 집중되고 이리역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가지가 번성하였고, 당시 이리시장[현 남부시장]은 전라북도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개발 과정에서 일본인의 이리 유입도 급증하여 1910년 5가구 16명이었던 것이 호남선이 개통된 1912년에는 270호 946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경에는 6,199명의 일본인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3,279명이었으니 일본인 유입이 얼마나 많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통팔달의 터미널 역으로서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던 이리는 쌀 집산시장, 이리농림학교, 전북농사시험장, 익옥수리조합 등이 설치되면서 급속하게 호남평야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한편, 동이리역은 1914년 11월 12일 전라선 철도가 개통될 때 설치되었는데, 당시는 ‘구이리역’이라 불렀다. 전라선 하행 구간 첫 번째 역으로서, 여객보다는 화물 운송이 주로 이루어졌다.
[익산 재탄생의 기점, 이리역 폭발 사건]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은 호남선 철도와 군산선 철도의 개통 당시 완공되어 역무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1977년 음력 11월 11일 밤 9시 15분,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화약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중에 폭발하였다. 이 폭발 사고로 역 구내에 있던 객차, 화물열차, 기관차 등 30여 량이 파손되었고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다. 사상자는 1,402명[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이었고, 전체 1만 3362채 가옥 가운데 9,530동이 전파 또는 부분 파손되었다.
이리역폭발사고 로 이리역사는 크게 파괴되어 철거 후 기존 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가량 이전하였고, 구(舊) 역사 앞 번화가인 영정통(榮町通)과 일지출정(日之出町)을 대체하는 새로운 T자형 간선도로, 즉 중앙로와 익산대로[남북로]가 개설되었다. 일제 강점기 관공서와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한 공공업무 시설과 여관, 요식업 등을 비롯한 문화서비스 시설이 집중되었던 영정통과 일지출정 일대는 현대식 상가가 늘어선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식 명칭 ‘영정통’과 ‘일지출정’은 중앙동으로 바뀌었다.
이리역폭발사고 로 인한 시가지 재정비 사업으로 호남의 근대 거점도시 익산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도시 발달 과정에서 대부분의 도시가 동일한 공간 안에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누적되는 특성을 보이는 데 반하여 익산은 도시의 중심지가 시대별로 전혀 다른 공간적 영역을 점거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익산이 호남평야의 양곡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기 위한 교통 인프라를 기반으로 계획적으로 조성된 근대도시라는 점이다. 중세까지 익산의 중심이었던 금마가 구도심으로 쇠락하고, 그 대신 이리역 주변에 일본인 이주민들의 근대 신시가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리역폭발사고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현대적인 시가지로 재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리역폭발사건 후 1978년 11월 10일 새로 이리역사가 준공되었다. 신축한 역사는 건물도 웅장하였을 뿐 아니라 역 광장의 면적이 6,000여 평[약 1만 9835㎡]으로 전국에서 가장 넓었다. 새로운 이리역은 1995년 5월 10일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어 익산시가 되면서 이름이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2011년 10월 5일 익산과 여수를 잇는 180㎞ 구간의 전라선 복선 전철이 착공 11년 만에 완공되고, 2015년 4월 2일 서울 용산역과 광주 송정·목포를 잇는 KTX 호남선이 정식 개통되었다. 2016년에는 SRT 개통이 이루어지면서 익산은 교통의 요지라는 명성과 함께 도농복합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익산역의 이용객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역사 앞 구도심 활성화에 대한 기대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도로에 새겨진 희로애락의 역사]
익산시의 도로 역시 전국 어디나 사통팔달하는 편리한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익산IC가 익산 동부를 지나 금마면 진입로에 있고, 국도1호선과 ‘전군도로’로 불리는 국도26호선을 포함하여 10여 개의 국도, 지방도 등이 사방으로 뻗어 전국 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다.
전군도로는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전주와 군산 간에 건설한 도로로서, 1908년 10월에 개통되었다. 폭 7미터, 길이 46㎞에 달하는 신작로가 뚫린 것이다. 호남평야 한복판을 관통하여 시원스럽게 뻗은 전군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이다. 잘 닦인 전군도로에는 군산항으로 양곡을 실어나르는 트럭들과 달구지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확기 서너 달 동안은 볏섬을 가득 실은 달구지들이 이삼십 리씩 행렬을 이루기 예사였다고 한다.
1975년 전군도로를 왕복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번영로’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 관동지구 전북인회의 지원을 받아 벚나무 6,374그루를 가로수로 심었다. 벚나무가 자라 매년 봄이면 도로 양편에 아름다운 벚꽃이 만개하였면서 상춘객이 줄을 이었다. 국내 첫 포장도로인 전군도로의 100리 벚꽃길이 명성을 얻으면서 벚꽃축제와 마라톤대회 등의 행사도 열렸다. 전군도로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익산 목천포 만경강 강둑길은 벚꽃축제를 찾은 사람들과 차량으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해마다 자연의 순리대로 피는 꽃이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탐스러운 꽃송이와 눈꽃 날리듯 흩뿌리는 꽃잎에 매료된 사람들과 달리, 전군도로 100리 벚꽃은 수탈의 길에 이식된 일본의 꽃 사쿠라라는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이 과거 이 길을 통하여 군산항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반출되었기 때문이다.
전주와 익산,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는 통한의 역사를 간직한 채 2002년 5월 전주-군산 간 산업화 도로[일명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통되면서 지방도로 전락하였다. 전라북도는 앞으로 근대 역사 문화 자산인 100리 벚꽃길 스토리텔링을 마련하고 주변 생태환경자원과 연계하여 옛 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익산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외곽도로가 전군도로라면 도심의 대표적인 간선도로는 이리역을 중심으로 T자형으로 개설된 중앙로와 남북로를 들 수 있다. 이리역폭발사고 후 이리역사가 이전 신축됨에 따라 새로운 이리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T자형 간선도로인 중앙로와 남북로가 개설되고 구획도로들이 확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익산 도심에 격자형 도시평면이 구축되어 지금까지도 익산 시민들의 생활 공간이자 통행로로 활용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철도 거점역이라는 로드맵]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달리던 경의선 철도는 남북 분단으로 끊어졌다. 1905년 일제가 대륙 침략의 목적으로 부설한 경의선은 총 연장 499㎞이다. 1911년에는 압록강철교가 개통되어 서울 남대문과 만주 장춘(長春) 간 직통 급행열차가 운행되었다. 이로써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륙철도의 발판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경의선을 달리던 열차도 멈추어 섰다. 파주시 임진각 남쪽의 통일공원에는 ‘철마는 다시 달리고 싶다’라고 쓰인 철도중단점 표지석 앞에 경의선 열차가 멈춰 서 있다. 분단만 아니면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종횡무진 달릴 수 있는 열차가 멈추어 선 채 남북 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경의선을 따라 북한과 연결되면 신의주에서 중국의 하얼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유라시아의 대륙을 잇는 대륙철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최근 익산시는 익산역을 유라시아 대륙철도의 거점역으로 추진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하였다. 호남의 대표적인 KTX 환승역 익산이 갖추고 있는 철도 인프라는 유라시아 대륙철도 거점역으로서 이미 손색이 없다. 익산은 유리한 철도인프라를 활용하여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 가야 한다. 앞으로 익산이 유라시아 철도망 구축이라는 거대한 비전의 로드맵을 어떻게 그려 갈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