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38 |
---|---|
한자 | 改新敎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성환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한국에 개신교(改新敎)가 전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이다. 1879년에 백홍준, 이응찬 등 4명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878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884년에 서상륜 형제가 황해도에 송천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라북도 지역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893년부터이다. 1893년에 미국 남장로교회 이눌서 선교사의 어학교사였던 정해원이 전주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전위렴 선교사와 최의덕[L.B.Tate] 선교사가 전주에 내려와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94년 3월에 유대모 선교사와 이눌서 선교사가 군산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전주와 군산 지역의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그 후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었는데, 익산의 개신교도 이 과정에서 전래되었다. 오늘날 익산 지역에서 장로회 계통의 교회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또한 익산 지역의 개신교인 중에는 최대진, 백낙규와 같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 많고, 일제 강점기에는 만세운동이나 신사참배 거부와 같은 독립운동에 개신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익산 지역 개신교의 특징이다.
[역사]
익산의 개신교는 전주와 군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장로교회 선교사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全緯廉, 1865~1908], 루터 맥커첸(Luther Oliver McCutchen)[馬路德, 1873~1960], 불(W. F. Bull)[부위렴, 1903~1938] 등에 의해 전래되었다. 익산에 개신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897년에 군산선교부의 전킨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1897년에 전위렴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이성일 등 7명이 익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1899년에는 이윤국 외 13명이 익산 지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1900년에는 이윤국의 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남전교회의 시작이다.
멕커첸 선교사는 1902년에 전주 지역 선교사로 부임하였고, 1903년에는 익산시까지 선교활동을 넓혀 익산 지역에 서두교회[1903년], 선리교회[1905년], 황화정교회[1907년], 익산읍교회[1907년]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익산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교회들이 많다. 익산에서 가장 오랜된 교회는 함라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남전교회가 익산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1902년에는 백낙규[1876~1943]를 중심으로 익산시 황등면 동연리에 동련교회가 설립되었다. 동학 접주 출신인 백낙규는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에 익산의 황등장터에서 윌리엄 해리슨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개신교인이 되었다. 백낙규는 송구선 등과 1900년에 동련교회 기도처를 세웠고, 1904년에는 동련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백낙규는 1921년 평양에 있던 의사 계원식을 황등에 초청하였고, 계원식은 백낙규의 삶에 감동을 받아 1921년에 황등교회를 세웠다.
[독립운동]
익산의 개신교는 일제 강점기에 천도교와 함께 1919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0일에 웅포의 제석교회 교인 강금옥, 한길용, 강관성, 이형우 등이 중심이 된 익산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금옥, 한길용, 강관성, 이형우 등은 익산의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군산과 강경 지역 만세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이처럼 제석교회가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 까닭은 김구의 독립운동을 돕던 엄칠중이 만주에서 고향인 웅포면 대붕암리로 내려와서 제석교회 교인들 중심으로 거사를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제석교회 교인들이 다니던 사립부용학교는 만세운동에 제석교회 교인들이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강제 폐교되었다.
1919년 4월 1일에는 고현교회의 오덕근 장로가 이리 역전 만세운동에서 태극기를 배포하다 구속되었고, 1919년 4월 4일에는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와 교인 150여 명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동에 참여한 군산영명학교 교사 문용기는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오른팔이 잘리니까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고 만세를 불렀다. 다시 왼손까지 내리치자 땅에 뒹굴면서 마지막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다. 군산 구암교회의 삼일운동기념관에 문용기 열사의 피묻은 두루마기가 전시되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2013년에 제석교회와 남전교회를 한국기독교 사적 제18호와 19호로 지정하였다. 늘문이교회[현재 대장교회]의 박도현도 문용기와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서두교회의 1대 장로인 김성환 장로와 그 뒤를 이은 박병열, 최병수 장로 등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다 옥고를 치렀고, 이 중에서 박병열 장로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성결교회와 용안침례교회도 1943년~1944년에 신사참배 거부를 하다가 교회가 폐쇄되거나 교인들이 검거되었다.
[현황]
익산시의 종교 인구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것이 개신교인이다. 2017년 기준 익산시 총 인구는 30만 9804명인데 이 중에서 31%에 달하는 9만 6344명이 개신교인으로, 2만 9289명의 불교 인구, 3만 4260명의 천주교인을 합친 숫자보다도 많다. 익산에는 2017년 현재 총 461개의 크고 작은 교회가 있는데 대부분이 장로회 계통이다. 2019년 현재 신도수가 많은 교회는 신광교회[익산시 마동 129-2] 1만 2000명, 남중교회[익산시 창인동1가 165] 3,500명, 영생교회[익산시 부송동 716] 2,200명, 새롬교회[익산시 모현동1가 394] 2,000명, 고현교회[익산시 모현동1가 470-1] 1,500명, 이리중앙교회[익산시 중앙동3가 49-1] 1,500명이다.